<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 본문의 촛점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에 있습니다. 사람 곧 우리들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지금 허리케인 “로라”의 재해지역 <루이지애나 주(州)>나 이미 장마로 인해 심한 재해를 입은 <전남 구례지역>, 그리고, <중국 우한 바이러스>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거나, 위험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인사불능의 불치병>에 걸려서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들, 이들을 지칭하는 가장 적절한 말씀이 바로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입니다. 심지어는 국가를 대표하여 천하를 호령하던 <일본수상 아베>와 같은 최고 권력자조차도 질병으로 쓰러지면 하루아침에 역사 속으로 퇴장 당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모두 다 강한 듯 하여 보이지만 그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가면 한결같이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요, <꺼져가는 심지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목회하시던 당시나 지금 21세기와 같은 현재나 <약한 자>, <소외되고 병든 자>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약한 자를 예수님께서 주목하십니다. 그들은 <귀신들
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이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목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22절에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명료한 목적은 “너희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라는 것을 깨우쳐주시려는 것, 그저 문제 제기만을 내세우시는데만 그치는 <피상성, Superficiality>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제의 본질을 진실로 해결해주시는 것이야말로 <피상성의 포로>가 아니라 <전정성의 선구자>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본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의 주요사상이 무엇일까요? 상한 갈대는 갈대로서의 그 기능을 다 했으므로 이러한 갈대는 부러뜨려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처입은 갈대>를 온전한 모습으로 치유하는 데 있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거의 다 타버려서 그 심지의 원래 사명인 불을 밝히는 기능을 다했기에 그 심지는 아예 꺼버려야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내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탈 피상성>의 핵심의지입니다.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가 너무나 지쳐서 기진맥진하여 비록 풀에 맺힌 이슬 같은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심오하고 진정한 긍휼심>을 가지고 치유해 주십니다.
<초로인생(草露人生)>입니다. 이사야 40:6, 22에 보면, “모든 육체는 풀이요,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선지자 이사야는 세상 사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인지를 잘 피력하고 있습니다.
<갈대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1:7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상한 갈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지금 <상한 갈대>인 우리들을 찾고 계십니다. 거듭
거듭 실패하고, 세상에서 버림받고, 죄악에 물들므로 죄책감에 시달리고, 질병과 고난과 상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고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상한 갈대, 베드로>는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어 성령으로 굳건한 사람이 되어 하루에 3천명씩 전도하는 강한 갈대로 변화되었습니다. 히 6:19에,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 말씀합니다.
저자 마태가 만난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온유하신 주님”이십니다. 마태가 우리에게 만나기를 원하는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셔서 <피상성>에서 벗어나 <심오성>을 실행하신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상한 갈대>는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베드로가 됩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예수님을 의지할 때 비로소 영과 혼과 육이 임마누엘의 승리자가 됩니다(계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