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찻물 끓는 소리는 언제나 마음을 안정시킨다. 식구들이 모두 집을 나선 아침,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분주했던 아침 일과가 대충 마무리되면 비로소 찻물을 올린다.
마당에 내린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마시는 차는 마음을 정화한다. 값비싼 다기 세트가 아니어도, 격식을 갖춘 다도의 예가 없어도 나를 탓할 이는 아무도 없다. 한 줌 찻잎을 넣은 다관에 끓는 물을 붓고, 담황색으로 우러나는 찻물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가끔 집안에 가득 내린 정적을 깨고 싶어 장난스럽게 다관을 높이 들고 찻잔을 겨냥해 찻물을 따르며 혼자 웃기도 한다.
따스한 찻잔에 입술을 대고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다 보면, '지금 내 삶에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하는 만족감에 젖는다. 어릴 적 중년이 된 나를 상상했을 때, 그 시기의 내 인생엔 무언가 이룬 것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은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여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긴장과 도전, 이익과 손해, 오해와 미움 같은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살려 했던 희망 덕분에 단순할 수 있었던 삶이었다.
작은 이익에 현혹되지 않고자 노력했던 나의 삶에 만족한다. 그 덕분에 딱히 내세울 성과 없는 내 인생 노트는 여전히 여백투성이다. 끊임없이 미래만을 향해 당겨지는 자석 같았던 나의 이십 대는 오래전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인생을 창조하겠다는 야무진 꿈으로 설레던 나의 삼십 대는 가정과 모성애라는 울타리 안에서 바깥쪽만 바라보다가 떠나갔다.
긴 병치레로 인해 인생의 한 부분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심리처럼,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불혹의 삶은 조급했다. 누가 알까 숨겨왔던 애환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가슴을 짓누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간 일들은 관조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느새 찻물이 식었다. 차 한 잔을 더 마시려 부엌으로 향하다가 창밖을 내다본다. 파란 하늘에는 바람이 스쳐 간 길목을 따라 구름이 흘러가고, 나무 가지 끝에는 빛바랜 잎사귀가 대롱거린다. 잎을 떨어뜨리고 드러낸 나목들이 보이는 썬룸에서 차를 마시며 얻는 평화로움과 행복감에 취해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잎도 때가 되면 떨어지듯이, 인간사 또한 마찬가지다.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그토록 아끼던 젊음도 건강도 세월 앞에서는 스러질 수밖에 없다.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과 한낱 인생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 잔의 차와 마주하는 이 시간을 각별하게 아끼는 이유다.
행복이란 현재를 즐기는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 경험의 총계라고 한다. 스스로 행복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때때로 감정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미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급하지 말자.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말자. 미래만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결국 지금 누리는 행복을 놓치게 된다. 천천히 물들이는 찻잎처럼 조금씩 내 삶을 나만의 빛깔로 물들이며 사는 것이 가장 나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진정 내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후회 없는 삶을 희망하며 미래를 바라기보다는 지금 한 잔의 차로 행복함을 즐기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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