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음료의 역사
잔혹한 더위가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추석을 불과 2주 남겨 놓은 지금도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0도를 웃돈다. 처서가 지나면 가을 기운이 깃든다는 '처서 매직'도 올해는 미약했다. 무더울 때면 나도 모르게 이온음료를 떠올린다. 엄청나게 찾아 마시는 것도 아니건만, 땀으로 필수 전해질 성분(나트륨, 칼륨, 칼슘, 마그네슘 등)이 빠져나가니 꼭 필요할 것만 같다.
마시지 않아도 생각난다는 건 그만큼 마케팅을 통해 제품 이미지를 잘 구축해 놓았다는 의미다. 한국 이온음료 시장은 미국 게토레이와 일본 포카리스웨트가 양분하고 있다. 전자는 격렬한 스포츠의 활동적 이미지를, 후자는 광고에 주로 소녀를 등장시켜 청량한 이미지를 강조한다. 개발국과 배경, 문화 등이 반영된 결과다.
게토레이(Gatorade)의 역사는 196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름 속에 이해의 실마리가 숨어 있다. 1987년 한국에 진출하면서 발음하기 좋게 ‘게토레이'라고 명명했지만 실제 발음은 ‘악어(Gator)'와 ‘도움(aid)'의 조어인 ‘게이터에이드'다. 말하자면 ‘악어를 위한 도움'인데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의 마스코트가 악어다. 게토레이는 플로리다주립대 운동 선수들을 위해 개발된 음료다.
대학 미식축구는 미국에서 최고 인기 스포츠 중 하나고 플로리다주립대는 나름 미식축구 명문에 속하는 팀이다. 그렇다 보니 기대치가 높아 학생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할 방안으로 게토레이가 개발됐다. 로버트 케이드 박사(1927~2007)가 이끄는 대학교 의과대학팀이 개발에 나섰고 선수들이 소모한 탄수화물과 수분, 전해질을 손쉽게 보충해 주는 게 목표였다.
사실 게토레이 이전에 이온음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 개발된, 역사가 192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루코제이드가 있었다. 게토레이는 루코제이드를 본떠 물에 소디움, 설탕, 포타슘, 황, 레몬즙을 섞어 만들었는데 미식축구 선수들이 마셔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런 가운데 1967년 플로리다주립대 미식축구팀 ‘게이터스(악어들)'가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하며 게토레이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원래 ‘악어를 위한 도움'이라는 의미에 충실해 게토레이의 철자는 ‘Gator-Aid'였지만 상품화를 고려해 Aid를 Ade로 바꾸었다. ‘도움(Aid)'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쓸 경우 약품으로 규정돼 끝없는 시험을 거쳐야 할 것을 우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레모네이드'의 사례처럼 ‘ade'는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음료에 붙이는 접미어였으므로 이래저래 더 나은 대안이었다.
게토레이는 1987년 제일제당을 통해 한국에 진출했다. 1982년부터 SV-C가 제일제당을 통해 한국 진출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시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류됐다. 원래 제일제당은 1986년 6월 ‘아이소퀵'이라는 이온음료를 자체 개발해 시음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SV-C가 동시에 전개할 수 없다고 제동을 걸어 게토레이만 출시됐고, 오늘날까지 한국 시장 2위를 지키고 있다.
■시음 행사로 특유의 ‘씁쓸한 맛' 논란 잠재워
한국 이온음료 시장 점유율 부동의 1위인 포카리스웨트의 기원은 사뭇 다르다. 1973년 일본 오츠카제약 직원인 하리마 로쿠로가 멕시코로 출장을 갔다가 물갈이로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수분 공급을 위해 진저에일을 권했으나 로쿠로는 음료보다 마실 수 있는 링거액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귀국 후 회사에 보고했다.
오츠카제약은 당시 일본 내 링거액 공급 1위의 제약사였으므로 개발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서 게토레이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이온음료 시장이 확장됐다. 이에 오츠카는 게토레이에 비해 당분이 적은 이온음료를 만들겠다고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당분을 줄이자 입에 착 붙는 맛도 없어졌으니, 오츠카는 시행착오를 거쳐 당분 6.2%에 자몽맛을 첨가한 포카리스웨트를 출시했다.
포카리스웨트는 자몽맛 때문에 특유의 씁쓸함이 있다. 이 씁쓸함이 일본에서도 그다지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니, 출시 직후에는 생소하다 못해 ‘최악의 맛'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오츠카는 무상 시음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어 포카리스웨트의 맛을 알렸고 결국 시장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서도 포카리스웨트의 초기 반응은 비슷했다. 1987년 출시됐는데 맛이 이상하다는 평가가 대세였다. 사실 명성식품의 ‘XL-1', 태평양의 ‘솔라-X', 해태음료의 '헬스펀치' 등의 이온음료들이 시장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한국에서도 일본처럼 동아오츠카(당시 동아식품) 직원들이 출시 전부터 발로 뛰며 마케팅과 영업에 나섰다.
출시 1년을 앞둔 1986년에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이 좋은 기회였다. 국가대표 선수, 임원, 경찰, 운영요원 1만2,000명에게 포카리스웨트를 지원해 시음하게 해 좋은 평가를 얻어냈다. 서울올림픽 직전인 1988년 5월에는 월 200만 캔의 판매고를 올렸다.
■입맛 떨어트리는 파란색 앞세우고도 성공한 광고
포카리스웨트의 성공에는 제품 디자인을 비롯한 홍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상품 디자인 분야에서 코카콜라와 견줄 정도로 모범 사례인 포카리스웨트이지만, 사실 특유의 포장 디자인은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포카리스웨트는 오츠카제약의 첫 번째 식음료 제품이었다. 말하자면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디자인 담당은 청량감을 선사하는 파란색과 흰색을 조합해 포장을 개발했다.
하지만 이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식품업계에서 파란색은 ‘입맛을 떨어트리는 색'으로 포장 디자인에 쓰지 않지만 기업도 디자인 담당자도 관련 제품 출시 경험이 없으니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을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미 인쇄 등 현실적 절차가 마무리된 상황. 결국 파란색과 흰색 조합으로 그대로 출시될 수밖에 없었다.
내놓고 보니 예상대로 파란색이 불러일으키는 맑고 시원한 청량감이 갈증 해소에 좋다는 음료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면서 포장 디자인은 성공으로 판명 났다. 파란색의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이후 출시되는 이온음료들의 기본 색상으로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