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다형(茶兄) 김현승의 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중략>…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의 전령사가 실솔이라면 가을의 낭만의 고독의 대명사는 단연코 다형(茶兄) 김현승 시인의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의 시입니다.
이 소중한 시를 영혼의 청량제로 삼는 자체가 축복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요한복음의 본문의 메시지는 더 없는 기쁨으로 우리를 정화시킬 것입니다. 굿 뉴스(Good News)가 갈급한 시대입니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모든 매체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기쁨보다는 슬픔의 소식, 평화의 뉴스보다 전쟁의 뉴스, 경제부흥의 뉴스보다 인플레의 뉴스, 희망의 뉴스보다 절망의 뉴스. 세상이 전해주는 뉴스는 온통 어두운 소식들뿐입니다. 그러나,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진다 할지라도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이루어지는 굿 뉴스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메시지인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시작부터 세상종말을 알리는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온통 <굿 뉴스의 채움>으로 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희망, 오늘도 희망, 영원토록 희망의 실존자이십니다. 희망의 굿 뉴스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고 선포하십니다. 가을의 절대고독의 면전에서 절대낭만으로 시인의 순수한 신앙의 열정으로 기도하겠다는 결연한 그 믿음의 의지를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으로 접목한다면 <구원받았다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신앙>에서 <구원의 확신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만족>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없다면 그것은 의심과 두려움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과 <구원을 확신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만으로 안일한 신앙으로 일관하면서 행동의 삶이 결여되었다면 <속 빈 강정>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시인의 신앙열정의 하이라이트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하여 마지막 인생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같이 고독한 인생을 살지라도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는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는 말씀의 열매를 기필코 맛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