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능현 (서울경제 논설위원)
2015년 4월 미국 볼티모어에서 흑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가 경찰을 쳐다본 뒤 도주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그레이는 이 과정에서 척추를 심하게 다쳐 일주일 뒤 사망했다. 경찰의 과잉 대응에 분노한 흑인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확산돼 볼티모어는 ‘무법 도시’로 변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경찰 대응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이번 사태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느리게 진행되는 재앙(slow-rolling crisis)”이라고 했다. 흑인과 저소득층 차별, 일자리 감소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서서히 응축돼 폭발한 재앙이라는 뜻이다.
최근 미국의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에서 시작된 금융 부실 리스크가 글로벌 대형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CS) 등 전 세계로 확산되자 ‘느린 재앙’이 또 소환됐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15일 “SVB 파산 이후 미국 금융 시스템에 더 많은 압류와 폐쇄 사태가 닥치면서 ‘느리게 진행되는 재앙’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핑크는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공격적 통화정책이 금융 시스템의 균열을 일으킨 것이 첫 번째 도미노”라고 진단한 뒤 “자산·부채의 불일치가 두 번째 도미노가 될 것인가”라고 말했다. 이어 “SVB가 장기국채 투자로 몰락했는데 더 많은 은행들이 대차대조표 문제로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1차로 SVB가 무너지고 2차로 차입 의존도가 높은 지역은행들이 위험해지며 3차로 부동산·사모펀드 등으로 재앙이 전이된다는 경고다. 되돌아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금리 인상→모기지 연체율 상승→은행의 대규모 손실 등이 이어지면서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폭발했다. 위기 조짐이 보이면 봉합에 급급하기보다 선제적으로 약한 고리를 파악하고 유동성 확보에 나서는 등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방파제를 높이 쌓는 지혜가 필요하다. 재앙은 느리게 오지만 대응은 신속해야 피해 확산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