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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지워지지 않는 얼룩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6-08 10:21:29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지워지지 않는 얼룩

권순상 노흥성 부동산 470-218-6136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김 할머니가 양로원에 상담을 신청한 것은 8년 전의 일이다. 테네시 주에 사는 할머니에게 이 지역에 사는 친구가 알려 주었다고 했다. 서류 심사와 전화 상담만으로 어렵게 입소를 결정하고 나니, 혈혈단신이라 양로원에 가는 택시비 오백 달러를 깎아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삿날 택시를 타고 홀로 나타난 그의 짐은 가방 두 개가 전부였다. 돈부터 깎아달라던 가차 없는 집요함과 초라한 행색, 그것이 할머니의 첫인상이었다. 

처음 한 두주는 감시하듯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매서운 시선이 불편했다. 게다가 그의 유별난 식성은 이내 큰 대가를 요구했다. 평온하던 양로원의 일상이 부엌에서부터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채식만을 고집하며 조리법과 양념까지 자기 기준에 맞추라며 사사건건 주방 일을 간섭해 온 것이다. 음식에 투정을 부리는 통에 부엌은 긴장감이 감돌았고, 웃음이 넘치던 식탁은 다른 이들마저 눈치를 보는 불편한 자리가 되었다. 

보름정도가 지나자 할머니가 갑자기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타고난 내 팔자가 좋은 듯하다, 사는 게 넉넉해 보여서 부럽다면서 다시 태어나면 나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순수한 덕담인지 뼈 있는 비틀림 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묘한 칭찬 덕에 나는 본 적도 없는 금수 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딸로 신분이 상승하는 복을 누렸다.

지나친 칭찬은 남을 이용해 먹으려는 자들의 위장술이라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자 매달 내는 비용을 조금 깎아줄 수 없느냐고 슬그머니 속내를 내비쳤다. 그의 형편이 정말 어렵다면 용인할 수 있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 스스로 생계를 꾸리기는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입소 상담을 할 때, 할머니 친구가 내게 조심스레 일러 준 말이 있었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도 집 판돈을 무기 삼아 주변 사람들을 수하처럼 조종하려 했다 것이었다. 

자신의 재산을 쓰든 썩히든 그의 자유다. 하지만 소화제 한 알조차 옆방 사람에게 얻어먹으려는 할머니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최소한 예의조차 묵살하는 자린고비 행태, 타인의 일상을 파헤치며 이득을 취하려는 집착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테네시 주로 돌아가 예금 이자를 세며 사는 것이 그에게는 행복에 더 가까울 것 같았다. 결국 나는 할머니의 손에 택시비 오백 달러를 쥐여 주며 떠나보냈다. 

양로원을 운영하는 동안 수많은 어르신을 만났지만, 내 손으로 직접 내쫓아야 했던 사람은 오직 그 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떠나보내고 난 후 그가 머물던 방을 정리하다가 나는 씁쓸한 헛웃음을 삼켰다. 방에 설치했던 안전등과 사소한 집기들까지 몰래 가방에 챙겨 가 버린 것이다. 은행에 거액을 저축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것을 탐내던 할머니와의 경험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기억이었다. 

바로 어제였다. 오랜만에 들른 한국 마트 주차장에서 눈에 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8년이 흐른 지금, 할머니를 다시 보다니, 문득 스치는 반가움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가 다짜고짜 명함을 달라며 내 전화번호를 물어왔다. 언뜻 보아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해진 외양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간병인인 듯 한 이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이젠 은퇴를 해서 내게는 연락처가 없다며 조용히 돌아섰다. 

차에 올라타며 다시 바라본 할머니의 야윈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곧 핸들을 잡은 손끝으로 8년 전 그날의 불쾌한 잔상이 밀려왔다. 자신의 이사비용 오백 달러를 아끼려 안달하던 모습, 식탁의 기쁨을 앗아가던 이기심, 돈을 무기로 사람을 부리려던 오만함, 인사도 없이 안전등까지 챙겨 가던 몰상식한 인색함이 떠오르자 소름이 돋았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인간의 단면이었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처지가 바뀔지라도 남을 이용하려 들던 그 매서운 눈빛은 여전히 영혼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을 터였다. 내 양로원 세월 이십 년 속에서 유일하게 떨쳐내야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 나는 백미러로 멀어지는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에 들어서려던 죄책감을 버리고 서둘러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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