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까지도 춥던 날씨가 확 풀려 있었다. 준비했던 옷을 치우고 날씨에 맞춰 고르다 보니 미팅 시간에 겨우 턱걸이로 도착했다. 미팅을 막 시작했을 때, 진동으로 돌려놓은 전화기가 덜덜거렸다. 할머니 한 분이 의자에서 실신해서 응급실로 이송 중이라는 양로원 스태프의 보고였다. 아흔 살에 가까운 분이라 불길한 마음에 서둘러 양해를 구하고 미팅 장소를 빠져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이상하게 일이 꼬이는 날이 있다. 귀걸이를 걸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한쪽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든지. 옷걸이에 잘 걸어둔 옷이 밤새 바닥에 떨어져 입을 수 없게 구겨졌다든지, 당장 입으려던 옷이 달궈진 다리미에 눌어붙는다든지, 오늘이 그런 날 같다.
다행히 할머니가 복용 중인 혈압약 때문에 생긴 탈수 증상이라 치료만 끝나면 귀가해도 좋다는 간호사의 설명이었다. 가족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잠깐 눈을 감고 긴장을 풀어보았다. 직업상 반복되는 일임에도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이라 그런지 매번 용수철처럼 반응하게 된다.
할머니의 가족들이 도착하고 퇴원 절차를 돕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어깨와 등 근육이 땅기고 빈속은 쓰리고, 에너지 고갈 상태로 일상의 경직 현상 같다. 그저 두 다리 쭉 뻗고 탁 트인 하늘이 보이는 호숫가에서 잠시 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럴 때면 고개를 돌리면 어디든 숲이 있고, 5분만 걸으면 마음을 틔워주는 호수가 있는 지역에 산다는 것이 행운이라 느껴진다.
삶은 언제나 까다롭고 성가신 일을 던져주고는 잘 해결해 보라고 요구한다. 아침부터 꼬여버린 일상, 결과를 얻지 못한 미팅, 일에 대한 중압감, 시큰거리는 발목. 이런 것들을 해결하려 동동거리는 이 몸짓이 일 년 뒤 내 삶에서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로 남게 될까. 이 시간,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잠깐의 멈춤, 마음을 비워보자.
호숫가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가끔 들르는 이곳은 사람의 손길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나의 쉼터다. 나무 벤치에 앉아 오가는 오리 떼를 바라보기도 하고, 쓰다 만 수필을 마무리하거나 무심히 떠오른 시구에 흥겨워하며 산책하는 곳이기도 하다.
소리 없는 움직임은 언제나 평화롭다. 투명한 하늘에 저녁 햇살을 머금은 구름, 하늘빛이 내려앉은 호수와 사방에 보이는 겨울의 빈 숲, 어느 것 하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없다. 장난삼아 던진 작은 나뭇가지가 만드는 파문이 수면 위에서 살랑거린다. 종종걸음 치던 하루의 긴장감이 어느새 사라진다.
영국 시인 윌리엄 헨리 데이비즈의 시 '여유'를 떠올려 본다.
"근심만 가득 차 멈춰 서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그게 무슨 인생이겠는가. 양이나 젖소처럼 나뭇가지 아래 서서 물끄러미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숲을 지나면서 다람쥐가 풀밭에 도토리 숨기는 걸 볼 시간이 없다면, 한낮에도 밤하늘처럼 별 가득 찬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참 딱한 인생 아니랴, 근심만 가득 차 멈춰 서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맞다. 잠시 멈춰 서서 여유를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을 제대로 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 따끈한 커피 한 잔 사들고 호수가로 오길 잘했다. 남편의 저녁밥이 조금 늦어지면 어떻고, 나를 게으르다 질책한들 무엇이 그리 큰 문제가 되겠는가. 지금은 시야가 휑하니 뚫린 이곳에서 피우는 게으름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보약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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