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저녁 식사 후 소파에 기대 앉아 있던 엄마가 불쑥 혼잣말을 하셨다. “춘성이 생각이 난다.” 한국에 사는 내 친구 중에 같은 이름이 있는 지라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니, 엄마가 어떻게 춘성이를 알지?” 하지만 지역적으로나 시간 때로나 두 사람은 절대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을 즉시 인지하고 나서는, 슬며시 내 장난기가 발동했다.
“어머나, 구십이 지난 여인께서 남편도 자식도 아닌 웬 외간 남자의 이름을 부르시나, 혹시 엄마의 옛날 애인이셨나?” 농담 섞인 질문이었지만 엄마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님, 이제라도 회개하시고 속죄함 받으시지요.” 밤잠을 청하기 전에 남은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엄마에게 장난을 걸었다. “에구, 그때 그냥 줄 걸, 그 까짓 게 뭐라고.” 엄마가 혼자 읊조리셨다. “엄마, 누구한테 뭘 준다는 소리야?” 내 물음에 엄마는 아주 오래 된 상자를 열 듯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춘성이는 엄마 친정 집 마름의 아들이었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상사병을 앓다가 세상을 등졌다. 춘성이의 장례 행렬이 엄마 집 앞을 지나가려 했을 때 상여꾼들의 발이 멈췄다. 상여가 움직이질 않았다. 구경하고 있던 엄마에게 춘성이 누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예쁜아, 네 옷가지 아무 거나 하나만 줄래? 우리 동생이 여기를 지나지 못하는 구나.”
그 말이 어린 엄마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열여섯 살의 엄마 자신이 한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걸 깨달았던 찰나였다.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 기묘했던 순간, 춘성의 죽음에 영문도 모른 채 엮였다는 당혹감, 한 사람의 마지막을 붙들고 있다는 섬뜩함에 돌아서서 집안으로 냅다 뛰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다.
엄마는 종종 과거 이야기를 하셨다. 6.25 때 피난 생활, 힘들었던 결혼생활, 시집살이 이야기, 나를 키우며 행복했던 날들, 그러나 춘성의 이야기는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동화였다. “그 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몰랐어.” 이야기를 마친 엄마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셨다. 마치 열여섯 소녀의 수줍음과 세월을 이겨낸 어른의 깊이가 깃들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기억했던 것은 과거에 자신을 짝사랑한 춘성이가 아니었음을. 그의 상사병은 엄마에게 죄책감이나 슬픔이 아니었다. 오히려 열여섯 살의 청춘, 그 자체의 증표였다. 망자가 목숨을 버릴 만한 존재였던 어린 엄마 앞에서 상여가 떠나지 못하고 상여꾼들의 발을 멈춰 세웠듯이, 엄마의 청춘도 그 때, 그 곳에 멈춘 채 누구의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단지 ‘예쁜이’라 는 이름으로 불리던 열여섯의 소녀로 숨어 있었던 것일까?
엄마는 늘 “늙어도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고 말씀하셨다. 당혹감과 두려움에 옷가지 하나 주지 못하고 대문을 걸어 잠그었던 미성숙했던 엄마의 청춘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후, “그 때 그냥 줄 걸” 하는 넉넉한 미소로 마무리 지었을 때 비로소 완성 되었던 것같다. 그래, 어쩌면 몸은 늙어 꼬부라져도 마음은 언제나 청춘일 수 있는 건, 그것은 문 밖에서 상여를 멈춰 세울 만큼 간절했던 누군가의 이름자를 가슴 속에 숨겨 놓은 덕분인지도 모르지.
언젠가 내 생애가 저물 즈음 되돌아볼 때, 누군가에게 전부가 될 수 있었던 청춘 시절의 기억이 내게도 있을까? 엄마가 작고하시기 두 해 전, 향년 아흔 살 때 해 주셨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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