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관람한 영화 한 편이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캐나다의 소설가 얀 마텔의 원작 소설 『파이 이야기』를 이안 감독이 제작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다. 책으로 먼저 읽고 영화는 나중에 보았다. 주인공 파이가 가족과 함께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만나 가족을 잃고 망망대해에서 생존하는 이야기다. 인도에서 캐나다로 가던 중 화물선이 침몰한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16세 소년은 간신히 보트에 오른다. 파이가 호랑이와 표류하며 겪는 227일간의 생존 여정을 담았다. 파이는 한치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바다에서 온갖 폭풍을 만나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긴다.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인간의 생존 본능과 심리가 잘 드러난 영화다.
소년이 탄 보트에 호랑이,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이 있었다. 소년은 보트에 타고 있던 짐승들과 동행한다.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벵골호랑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동물들은 하이에나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결국, 하이에나도 호랑이에 의해 죽고 파이와 호랑이만 남는다. 파이는 거친 바다에서 배고픔과 추위, 외로움과 두려움,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그것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은 자기 곁에 있는 호랑이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거였다. 적이 있었기에 항상 긴장하고 외로울 틈이 없었다. 파이 곁에 벵골호랑이가 없었다면 항해 중에 폭풍우 속에서 이미 죽었을 거였다. 우리 몸에 세균이 침입하면 병균과 싸우기 위해 저항력이 생기는 것과 같은 원리다. 파이는 긴 표류 중에 자신과 함께한 호랑이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파이가 어느 섬에 도착해서 사람의 치아를 발견한다. 그 섬은 밤이 되면 산성화가 되어 모든 것이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상한 섬을 벗어난 소년은 멕시코의 어느 섬에서 인명 구조단에 의해 구조된다. 호랑이는 정글을 발견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숲속으로 향한다. 파이가 호랑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오랫동안 서 있는 장면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나는데 읽는 독자에 따라 다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같은 책을 읽어도 독자마다 밑줄 긋는 문장이 다르다. 인생의 거친 바다에서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파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과 직면하게 된다.
삶의 변곡점 지날 때마다 종종 복병과 변수를 만난다. 우리 의지나 선택과 무관하게 불가항력적 환경이나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다. 파이가 표류하며 동행했던 호랑이 같은 존재가 있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다양한 폭풍우를 만난다.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파도를 대면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아닐까. 새해에도 우리 앞에 펼쳐질 미지의 문을 연다. 어떠한 바람과 파도가 엄습해도 요동하지 않고 너끈히 서핑하며 순항하길 소망한다.
<박영실 수필가ㆍ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