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일과의 전부다. 창이 있어 마음이 호흡할 수 있음이요, 찾아 주는 이 없어도 창이 있기에 하늘과 구름과 별빛이 벗이 될 수 있다. 바람도 집안 깊숙하게 찾아 들어 벗이 되어준다. 벗이 된 바람은 세월을 담고 있는 살아온 노정을 화려한 노을 그림자로 거실 벽에 고운 벽화를 만들고 있다. 쌓인 외로움도 벽화를 배경으로 효과음을 빚어낸다. 노을을 불러들여 벽화를 그려준 바람같이 이 세상을 떠날 수만 있다면 할머니는 행복할 것 같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용서할 일도, 용서 받을 일도, 사랑의 빚을 갚을 일도, 미쳐 감사를 표하지 못했던 일도, 셀 수 없을 만큼이지만 더는 연연하지 않으려는 것은 죽음의 침묵까지도 용서받고 싶기 때문이요, 앞서간 죽음을 향한 침묵을 용서 받고 용서해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걸어온 걸음이 다 기억에 남아있진 않지만, 모든 기억들을, 햇살 좋은 날 빨랫줄에 빨래를 말리 듯 햇살 앞에 널어두고 모든 기억들이 퇴색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승과 저승은 멀고도 가까운 것, 내 어머니보다 내 동생보다 오래 살아버린 나를 돌아본다. 살아있는 이 날이 가을이어도 행복이요 봄이어도 평안 이어라. 아침마다 거울에서 만나지는 할머니를 보고 이미 여자가 아니라 말하면서도 쓰다 남은 몽땅 립스틱을 보면 측은지심이 울컥 한다. 절친들 중엔 잘 웃기는 친구, 조용한 친구, 자꾸만 베풀려고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다 좋지만 살아있어 주는 친구를 최고 절친으로 삼게 된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병원을 찾았더니 퇴행성이라 한다. 비가 오면 무릎이 쑤시고 아파 병원을 찾게 되면 이도 퇴행성이라 한다. 마음이 저리고 아파 병원을 찾으면 퇴행성이라 할 것 같다. 창 밖으로 흐르는 구름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가고 싶은 것도 퇴행성일까. 의사 선생님들 진단도 퇴행성인 것 같다. 헷갈린다. 할머니 기억 줄이 닳아서 까무룩 인데 할아버지 기억줄도 쥐가 갉아먹은 듯 듬성듬성 까무룩 이다. 그 옛 날 캠퍼스 커플이 지금은 합창단 단원이 되어 로맨스 그레이 커플로 동행 중이다. 안경 찾아 삼만리도 심심찮게 재연 중인데 항상 찾아주는 이는 할아버지다.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들,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아리송한데 늘 챙겨주는 이도 할아버지다. 어떤 분이 자기 영감님을 보고 유머가 많고 너그럽다는 말에 댁이 살아 보셨냐고 물어볼 뻔 했다고. 영원한 남의 편이란 말이 사전에는 없는 말이라서 다행이다. 한날 한시 함께 세상을 떠나자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보다 하루만 더 살고 뒤 따르겠 노라는 할머니. 아름다운 약속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1위로 선정된 단어는 어머니다. 어머니 얼굴 뒤에서 끝 모를 사랑을 품고 어머니 사랑과는 결이 다른 가늠할 수 없는 베풂의 마음으로 무조건 대견스럽고 아깝고 보물 같은 안스러운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인 할머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모습이다. 자식들이 잘 자라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기다림이, 손주들을 위한 오롯한 기도와 겹쳐지면 기다림의 열매 맺음이 이어지고 자식을 낳아 다시금 그 자식을 향한 기다림의 아름다운 순환을 언약인양 기다림 할 수 있기에, 기다릴 수 있음에, 그리워할 수 있음에, 기다릴 대상이 있음에 행복의 눈 뜨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은 기다림 이요 그리움이다. 가족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홀로 할머니를 두고 떠나지만 양로원으로 가신 할머니는 아들 이름, 주소를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그리 놀랄 이야기에 들어가지 않은 지 오래다. 해서 부모는 어렸을 땐 디딤돌이요, 나이 들면 걸림돌이요, 더 늙으면 고인돌이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할머니는 자손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고향 같은 존재로 남고 싶어하지만 꿈같은 고지를 점령한 할머니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해서
일까. 어디선가 할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할머니는 그냥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요지경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부모들 중 나이 들면 자식과 함께 살 것이라 작정하는 간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 훗날에 부모님 노후를 돌보겠다는 젊은이 또한 없을 것이다. 생각 해보고 고민 끝에 못하겠다는 것이 아닌 아예 고민거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결혼할 생각이 있는 젊은이도 많지 않음 이요 혹여 결혼하더라도 부부 단둘만 가족일 뿐 부모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젊은이들이 대다수가 아닌 전부다. 배우자의 부모를 서로 고려 대상에 포함하지 않은 지 오래다. 노년을 넘기도록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고개를 내밀기도 전에 나이 들어 버린 자신의 모습에 서글픔과 애증이 도사리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노년 인구들이 흔히 출입하는 맥도날드 음식 주문 절차도 난관에 봉착했다. 셀프 기계로 자동 주문 이용 방법을 터치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소 함이 익숙함으로 바뀌기 까지 세월 타령이 2절 3절까지 이어질 수 밖에. 병원예약도 미리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서를 작성해서 전송해야 접수가 되고 병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앱 이용이 서툴러 택시잡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이 질퍽하다.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약자 집단이 누구일까 하는 질문 앞에 대답이 쉽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머리에 은발을 얹고 보니 노인들에게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지만 나이가 높다고 ‘뒷방 늙은이’가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세상은 노년병을 필요로 하거나 참여를 요구하는 곳도 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나누는 삶은 축복의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할머니 독백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들어주는 이 하나 없는 할머니들의 독백이 합창이 되어 울려 퍼진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