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세상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사람의 근본적 오류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이 오류의 발상이 마침내 온유의 진정한 정체성을 오해하여 <태만(Idleness)>이나 <무기력>이라고 잘못된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직접적으로 온유를 상징하는 대표적으로 언급한 인물은 구약의 <모세>, 그리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민수기 12:3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예수님의 공통적인 인성을 통해서 온유의 정체성은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즉 온유는 결코 태만하거나 무기력함을 인해서 유약해 보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온유는 일시적인 감정이나 겉으로 보이는 친절함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온유함>을 지지하는 말씀은 시편 37:11입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온유를 말하는 헬라어는 <프라에이스(Praeis)>입니다. 프라에이스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이 말씀이 주고자 하는 명제는 사람이 곤란하거나 역경의 상황에 도달해 있을지라도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펴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결과적인 보상이 되어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힘, 세력, 능력, 자신감, 공격성>의 <정복과 소유>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온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원인>과 <결과>의 구도로 본다면 <온유>가 원인이요 <땅>은 <결과>, 즉 <보상>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언약(Promise)입니다. 말씀에 대해 약속을 지키시는 분(Promise Keeper)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이 말씀은 단순히 물질적인 보상의 차원이 아닙니다. 상해를 입힌 자에게 거기에 적합하게 보상해주는 그런 편협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축복의 근원이심과 동시에 축복 그 자체이십니다. 마치 샘물이 끊임없이 생수를 공급하는 활명수이듯,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축복은 일시적으로 단명하는 시사성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고 불변하는 영원성이 보장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상급의 축복입니다. “프라에이스 즉 온유한”이란 메시지 속에는 엄청난 천국의 보화가 보장된 무궁무진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프라에이스(온유한)”는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따뜻하고 부드러움”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구체화를 말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 하고, 철학자 아리스토델레스는 “온유란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 하였습니다. 온유는 물질적인 차원의 경험이 아닙니다.
온유는 군사적인 차원의 전략과 전술의 저급한 경험이 아닙니다. 온유는 영적인 차원의 대신관계에서 하나님과 가장 긴밀한 천국의 차원에서만 찾을 수 있는 <오직 성령>에 의존할 때만이 얻을 수 있는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온유한”에 해당되는 진정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조직을 의지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세력과 능력과 제도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홀로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일지라도 두 손 두 팔을 활짝 펴시고 우리를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인내하며 소망하는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