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하늘과 땅 사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신 팔복 메시지의 두 번째 복은 세상 사람들이 접근하기에는 <엉뚱한 독>이 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현실과 <지나친 괴리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밝으신 혜안의 메시지를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말씀은 종말론적인 메시지임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마치 하늘과 현실의 거리만큼이나 멀어보이지만, <인생의 갈무리>는 항상 현실의 면전에 있음을 직시한다면, 결코 현실을 백안시하신 고상한 영적 품위만을 강조하시는 현실과 동떨어진 <천국 찬양론>의 메시지가 아니라, 가장 현실에 근접한 <절실한 종말론적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존재와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통찰력의 메신저로 우리의 속 마음을 알아주시는 우리 양심의 증인이십니다. 현실타개의 최선책을 제시하시는 최고의 인생 멘토인 동시에 영원한 구주 하나님이십니다. 애통함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 탈위기의 회복으로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분만이란 생각의 절실함을 가진 자를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돌로로사> 즉 슬픔의 정체성을 몸소 겪으시고 그 돌로로사의 길을 일관성있게 걸어오신 분이시기에 슬픔이 가지고 있는 그 비참함을 가장 현실감있게 겪으신 분이십니다(히 4:15). 단 한순간도 세상은 예수님을 <돌로로사 슬픔>과 무관하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습니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 예수님이 “행복한 미소를 띠셨다. 웃으셨다”는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7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예수님이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실 때, 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진의는 우리가 “애통하는 영혼”, “돌로로사 영혼”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수준정도에 그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인생의 갈무리가 필연적임을 깨닫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영적인 측면에서의 애통>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애통하는 자”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이간하는 <불의>에 대하여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도덕성과 자기 의>에 대한 애통하는 사람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슬퍼하고 통절한 회개를 하는 사람입니다. 위선적인 눈물, 웃음, 행복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가장 형오하시는 피상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결국 발견하려는 애통이 참 영적 애통임을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돌로로사 영혼의 예수님>이 원하시는 눈물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종말론적 메시지의 최초의 그 음성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마 4:17).
성경 66권 가운데 자신의 죄를 애통하며 참 죄의식을 가지고 실행한 <돌로로사 영혼의 예수님>을 가장 닮은 롤모델이 있다면 <다윗>입니다. 다윗의 애통의 기도가 시편 51편에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지은 시편이라고 소개한 시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현하, 애통하는 사람은 슬픈 사람이지만 결코 <병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슬픈 사람이지만 <비참한 사람>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심각한 사람이지만 <엄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퉁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위엄있는 사람이지만 <냉정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우리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의 복은 “거룩한 기쁨, 심각한 행복, 참 행복”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