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간 문화 교차, 대중문화 새 풍속
온라인 공연 시장의‘큰손’으로 60대 이상 고령층이 떠올랐다. 한두 달만 지나도 골동품 취급하는‘패스트 유행’을 이끌던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가 CD 가방 등을 사며 태어나기도 전 주목받았던 세기말 패션을 다시 유행시키고 있다.‘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는 젊은 세대의 매체이고, 복고는 중년층의 추억팔이’라는 대중문화 산업의 상식들이 깨지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 소비가 늘고, 온라인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손쉽게 만나면서 변화가 촉진됐다. 세대 간 문화 교차 현상이 빚은 대중문화 새 풍속도다.
■비대면 공연 큰손 ‘은빛 얼리어답터’
서울 마포구에 사는 이인순(68)씨는 지난 14일 열린 임영웅의 공연을 휴대폰을 통해 생중계로 봤다. 디지털 소외 계층이라 여겨지는 60대 후반은 어떻게 휴대폰으로 ‘방구석 1열’ 공연에 접속했을까. 이씨 모자가 들려준 과정은 이랬다.
OTT 티빙에서 임영웅의 서울 마지막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소식을 친한 동생한테 들은 이씨는 아들에게 SOS를 쳤다. 광복절 연휴 기간이었던 13일, 아들은 본가로 가 어머니 휴대폰에 티빙 애플리케이션을 깐 뒤 어머니 명의로 회원 가입했다.
이씨의 아들은 “코로나19로 어머니가 공연장에 가는 게 걱정됐는데 마침 비대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해 효도하는 마음으로 어머니께 사용법을 알려드린 뒤 (실시간 영상 보기) 예습도 했다”며 웃었다. OTT 세상에 처음 입문한 이씨는 “다음엔 아들한테 TV로 연결해 보는 법을 배워볼까 한다”고 말했다.
■TV 버린 ‘A세대’의 등장
디지털 기기와 거리감을 좁힌 A세대가 OTT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A세대는 나이를 초월(Ageless)해 생동감(Alive) 있고 취향이 확실(Attractive in my own way)한 50~69세를 일컫는다. 젊은 K팝 팬덤 못지않게 문화 향유에 열정적인 A세대가 코로나19 대유행 여파로 온라인 소비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콘텐츠 시장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60대 이상 고령층의 OTT 소비 증가세는 두드러진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올해 발표한 방송매체 이용행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60대의 OTT 이용률은 2019년 21.3%에서 2021년 44.4%로, 70대 이상은 4.4%에서 13.8%로 뛰었다. 2년 새 최대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A세대인 조은숙(62)씨는 하루에 두 시간 넘게 OTT를 이용하는 ‘헤비 유저’다. 그의 집엔 TV가 없다. 조씨는 “남편과 각자 취향에 맞게 유튜브 등을 통해 따로 (콘텐츠를) 본다”고 말했다.
이처럼 OTT를 적극 이용하는 A세대의 부상으로 대중문화 기획사들은 콘텐츠 유통 전략을 새로 짜고 있다. 물고기뮤직은 티빙을 통해 임영웅 서울 공연 다시보기 서비스를 21일부터 시작했다. 장년층 팬이 두터운 트로트 가수가 공연 실황을 TV도 아닌 OTT를 통해 유통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물고기뮤직 관계자는 “임영웅 ‘아임 히어로’ 공연 OTT 다시 보기 서비스에 대한 팬들의 문의가 빗발쳐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CD 가방’ 판 평균 나이 16.6세 그룹
A세대가 OTT시장의 덩치를 키우고 있다면, Z세대는 복고 소비로 대중문화 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최근 온라인에선 20세기에나 매물로 나올 법한 CD 가방 구입을 위한 온라인 대란이 벌어졌다. 이변을 이끈 주인공은 신인 그룹 뉴진스. 평균 나이 16.6세로 구성된 이 그룹이 낸 CD 가방은 지난달 예약 판매 당일 바로 동이 났다.
CD플레이어를 써 본 적도 없는 10대 소녀들에게 CD를 가방에 넣어 팔 생각을 한 이는 민희진(43) 어도어레이블 대표이사. 그는 “어렸을 때 CD플레이어를 항상 들고 다녔는데 마땅히 마음에 드는 사이즈의 가방이 없어 예쁜 파우치에 CD플레이어를 넣어 다녔다”며 “그때 기억을 되살려 음반을 가방으로 만들어보자란 생각을 하게 됐고, CD플레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로 제작했다”고 기획 의도를 들려줬다.
그 전략은 통했다. SNS엔 ‘CD플레이어까지 넣을 수 있는 CD 가방을 Y2K 패션 유행의 개념으로 구매했다’ 등의 글이 영어로 잇달아 올라왔다. Y2K 패션은 배꼽이 드러난 크롭티와 골반에 걸쳐 입는 통 큰 청바지 등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유행했던 세기말 패션을 일컫는다. CD 가방으로 Y2K 패션을 완성하려는 Z세대의 등장이다,
■체인 목걸이 찬 청춘 스타… ‘기묘한’ 열풍 이유
복고를 새롭게 즐기려는 Z세대의 ‘뉴트로’ 소비 열풍 속에서 1980~19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80년대 미국 인디애나주 가상의 마을 호킨스를 배경으로 한 ‘기묘한 이야기’ 시즌4는 공개 4주 만인 지난달 총 재생시간 11억5,124간을 기록하며 열풍을 일으켰다. 198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청년들의 삶과 사랑을 담아 화제를 모은 영국 지상파 채널4 드라마 ‘잇츠 어 신’(국내 방영은 ‘왓챠’)은 20세기를 현 대중문화 복판으로 소환했다. 26일 오후 공개될 넷플릭스 영화 ‘서울대작전’에서 청춘 스타 유아인은 한눈에 봐도 무거운 커다란 체인 목걸이를 달고 20세기의 ‘힙’함을 뽐낸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복고 열풍을 장년층이 아닌 요즘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게 ‘영트로’의 특징”이라며 “경험해보지 못한 옛것을 통해 새로움과 편안함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영트로 열풍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 행복위원회 위원은 “영트로는 젊은 세대의 구별짓기 수단”이라며 “정치·경제·사회 권력은 갖지 못해도 문화 권력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Y2K패션과 CD 가방 구입 등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양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