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혜 수필가
어떤 활기찬 것들은 치열함 속에서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관광객과 시민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시애틀의 영혼’이라 불리는 파이크플레이스마켓.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 중 하나인 엘리엇 만의 명소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200여 개의 상점에 활력을 불어넣는 상인들의 치열한 일상이었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부지런한 손과 발들의 일터 중 가장 맘이 끌린 곳은 아이 얼굴만 한 소담한 작약들로 빽빽한 노상 꽃집이었다. 흐드러진 예쁜 것들을 나르고 다듬는 손길에서 정직한 노동의 향내가 짙게 풍긴 까닭이다. 그건 꽃 내음에 비할 수 없는 성실함의 향기였다. 우렁찬 소리가 오가던 수산물 가게는 또 어떠한가. 패기 넘치는 건장한 점원들이 고객이 고른 생선을 카운터로 던지는 묘기에 몇 겹의 인파가 둘러쌌다. 물고기가 허공을 가르는 풍경이 시장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까지 쌓인 우직한 시간, 그 길에 흩뿌려진 피땀이 관광객들의 웃음 속에 스미고 있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사람들로 혼잡한 골목 뒤편에서 마주한 ‘로터리 그로서리’는 온도가 좀 다른 듯했다. 여러모로 개성 있는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레짐작했다. 호기심 어린 객의 눈에 그 상점은 그저 평범한 동네 구멍가게와 다름없었다.
허나 여행자의 판단이 섣불렀다. 시장이 생긴 1907년부터 이름만 몇 번 바뀌었을 뿐, 그곳은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행인들의 오아시스가 되어준 마켓의 터줏대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주인은 의외로 한국인이었다. 내심 반가우면서도 말을 아끼는 내게 먼저 알은 채를 한 것은 주인아저씨 헨리 김 씨였다.
“한국 사람이세요?”
버스 운전사, 관공서 직원 등 종종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는 고국 사람을 만난다. 그렇더라도 가벼운 인사 몇 마디와 함께 스치듯 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길게 말을 섞지 않는다. 그는 좀 달랐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가 고른 음료수를 계산하며 인생 여정을 술술 털어놓는 모습이 무척이나 진솔했다. 초등학교 졸업식과 군 복무 시절 사진까지 보여주며 어떻게 머나먼 땅에 흘러오게 되었는지를 회상하는 그는 오랜 지인에게 이야기하듯 서슴없이 말을 이었다.
“요새는 잘 꺼내보지도 않아요. 이제 와 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미국 오려고 군대도 미리 자원해서 다녀왔어요. 안간힘을 써서 이 널따란 땅덩어리에 닿은 지 벌써 43년이나 됐네.”
녹록치 않던 생을 더듬는 기억의 실타래는 멈출 줄 모르고 술술 풀어졌다.
“긴 세월 두 다리 쭉 펴고 잔 날이 없어요. 아무리 오래 살면 뭐하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기서 나는 그저 나그네예요. 이젠 먹고살 만하지만 맘 한구석이 늘 허전해요.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부인이랑 애들은 여기가 좋대요. 어쩌겠어요, 가족 곁에 남아야죠.”
1980년 초,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그는 병역 문제도 일찌감치 해결하고 과감한 도전을 택했다. 왜 그토록 미국에 오려고 애썼는지, 가게를 운영하기 전 무슨 일을 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2000년 전후 가게를 인수해 25년 넘게 쉬지 않고 문을 열었다는 사실 뿐이다. 50센트이던 콜라 한 캔이 2달러 넘게 훌쩍 오르는 동안 그와 그의 아내는 작은 식료품점을 살뜰히 꾸리며 호락호락하지 않은 생과 사투를 벌였다.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매일매일 짙은 어둠을 깨운 이민자는 타향살이의 고달픔과 그리움마저 분에 넘치는 호사로 여겼을 테다.
처음 보는 내게 속 깊은 사정까지 들려준 그와의 인상적인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북적이는 중앙 통로에 섰다. 삶의 무게와 활기가 교차하는 시장 길목마다 가슴속에 쌓아둔 응어리들이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타국에서 산 40여 년 동안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쓸쓸한 그 한 마디가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 번 더 만나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지난했던 이민사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날 오전 비행기로 돌아가야 했기에 도저히 짬이 나지 않았다. 짧고도 강렬했던 만남은 아쉬움을 남긴 채 끝이 났다.
1년의 절반이 우기인 도시답게 시애틀에서의 마지막 날에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흐린 하늘에 더욱 선명해지는 풍경도 있는 법, 어쩌면 이 도시를 촉촉이 적시는 것은 빗방울만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허리 한 번 필 여유 없이 생업에 매진한 값진 땀방울들이 시애틀의 눅진한 공기 속에 축축이 파고들고 있었다.
종종 그날 들었던 ‘나그네’란 말을 떠올린다. 몇 년을 살아도 나 또한 이 땅에선 나그네일 뿐일까. 이런 상념에 조금 씁쓸해질 때면 하루하루 더 성실하려고 애쓴다. 비록 나를 기다리는 게 부유하는 삶일지라도 그건 행복한 나그네일 거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그의 열심은 나를 통해 열매 맺고 있으며, 나의 어떤 수고는 또 다른 누군가를 통해 풍성히 영글 것이다. 정희성 시인의 시에 기대어 ‘강물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떠다 버리는’ 우리 모두는 그렇게 행복한 나그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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