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족쇄 푼 연방대법 결정 논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정치적 선물’을 안긴 미국 연방대법원의 ‘전직 대통령 면책 특권’ 관련 결정이 미국 정가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1일 연방 대법원은 지난 2020년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 혐의로 기소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중 행위는 퇴임 이후에도 형사기소 면제 대상’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일부 수용하는 취지의 결정을 했다. 전직 대통령의 재임 시 행위 중 ‘결정적이고 배타적인 헌법적 권한 안에서 이뤄진 행위’는 형사 기소로부터 절대적인 면제를 받고, 그 외 ‘공적(official) 행위’는 면제받는 것으로 ‘추정’되며, ‘사적(unofficial) 행위’에 대해서는 면책특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기소된 범죄 사실 중 대선 결과를 뒤집기 위해 법무부 당국자들과 논의한 내용은 ‘절대적 면책’ 대상이라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또 2021년 1월 마이크 펜스 당시 부통령에게 대선 결과 인증을 거부하라고 압박한 혐의에 대해서는 ‘면책이 추정된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이 혐의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하는 것이 행정부의 권위와 기능을 침해할 위험이 없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결정했다.
반면 대법원은 그 외 행정부 밖의 인사들과 관련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혐의에 대해서는 “대통령 기능 범위 안에 있는 일로 깔끔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기소 가능성을 열어뒀다.
아울러 기소가 절대적으로 면제되는 행동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고 대법원이 판단한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일로 해석된다. 특검이 대선 뒤집기 모의와 관련한 유력 증거로 간주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법무부 당국자 간 논의 내용이 증거 능력을 상실하게 됐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엄밀히 말해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 뒤집기 시도 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뒀지만, 미 대선이 11월5일 치러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큰 정치적 선물을 안긴 것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대법원으로부터 사안을 넘겨 받게 된 하급심 법원(워싱턴 D.C. 연방 항소법원 재판부)이 이 같은 대법원의 가이드라인을 트럼프의 혐의 사실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결정하는데 만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에 약 4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 전에 본안 재판이 시작될 가능성은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면책특권 주장을 재판을 지연시키기 위한 전략 차원에서 제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판결이 나오자마자 자신이 소유한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우리 헌법과 민주주의의 큰 승리”라고 환영하고, 민주당 의원 등은 분노를 표하고 있는 상황은 이번 결정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것임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리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뒤집기 시도 관련 공소 사실 중 일부는 ‘면책 대상인 공적 행위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은 이 사안을 보는 유권자들의 인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4건의 형사 기소 건 가운데, 유죄 평결이 내려져 오는 11일 1심 형량이 선고될 성추문 입막음돈 지급 관련 회사 서류 조작 사건만 사실상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로 남은 형국이다.
나머지 조지아주 법원에 계류 중인 또 다른 대선 뒤집기 시도 혐의 사건과 플로리다주 법원이 관할하는 기밀자료 유출 및 불법보관 혐의 사건은 전직 대통령의 재임 중 행위에 대한 면책 문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대선 전에 실질 공판이 진행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번 결정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가도에 청신호를 켜 준 차원을 넘어 현재 대선에 도전 중인 트럼프 전 대통령을 포함한 미래의 미국 대통령에게 퇴임 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상당 부분 덜어줄 수 있다는 예상도 제기된다.
면책이 인정되는 “공적 행동”의 범위가 포괄적이기에 대통령의 권한 남용 행위에 대한 제도적 견제 수단이 퇴색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지난달 27일 TV 토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극도로 부진한 성과를 거두면서 기세가 오른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백악관 재입성 가능성이 현실화하면 기존 제도와 법적 제한을 우회해가며 ‘목표’를 달성하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질주 본능’이 이번 대법원 결정을 계기로 더욱 탄력을 받게 되리라는 예상도 나온다.
소수 의견을 낸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전직 대통령의 범죄 혐의를 면책하는 것은 대통령직이라는 제도를 개조하는 일”이라며 “그것은 우리 헌법과 정부 시스템의 기초가 되는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정적을 죽이라고 ‘네이비 실(Navy Seal·미 해군 특수부대) 팀6’에 명령하는 것도 면책,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군사 쿠데타를 조직하는 것도 면책, 사면 대가로 돈을 받아도 면책된다는 것”이라고 SNS에서 주장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과 대통령이 섬기는 국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고 짚은 뒤 “(앞으로) 모든 공적 권력의 사용에 있어 대통령은 법 위에 군림하는 왕”이라며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는 반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중 잇단 보수 판사 기용으로 인해 6대3의 확고한 보수 우위로 재편된 연방 대법원이 잇달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족쇄를 풀어주는 결정을 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연방 대법원은 앞서 지난 3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출마 자격을 박탈한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을 만장일치로 뒤집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트럼프가 ‘대선 사기’ 주장으로 지지자들을 선동해 2021년 1월 6일 의회에 난입하도록 한 것을 반란 가담 행위라고 보고 콜로라도의 경선 투표용지에서 그의 이름을 빼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연방 업무를 맡기 위해 출마하는 후보에 대한 자격 박탈은 각 주의 권한 사항이 아니라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