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에 빠진 미국 경제
새해 미국 경제가 불확실성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다. 침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으로 월가와 일반 소비자들의 전망이 수렴되고 있지만 경제적 고통이 나타나는 양상에 대한 시나리오는 분석 기관마다 제각각이다. 충격이 크지 않은 ‘얕은 침체(Shallow Recession)’ 전망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일단 침체에 빠진 뒤 좀처럼 반등을 하지 못하는 ‘늪지대 침체(Swamp Recession)’부터 소득 상위층이 불황의 직격타를 맞는 ‘리치세션(Richcession)’, 공식 침체를 피하면서도 경기 악화에 따른 고통이 오래 이어지는 ‘슬로세션(Slowcession)’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기된다.
3일 여론조사 기관 갤럽은 미국 성인 180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9%가 올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한 해를 예상했다고 밝혔다. 경제 번영의 해가 될 것이라는 응답은 20%에 그쳤다. 지난해 6월 9.1%이던 소비자물가지수(CPI)가 11월 7.1%까지 낮아지며 인플레이션이 한 고비를 넘겼음에도 미국인들의 경제 전망은 어둡다.
월가의 전망도 마찬가지다. 블룸버그 조사에서 이코노미스트들이 내다보는 1년 내 침체 가능성은 이날 65%를 기록해 한 달 전보다 2.5%포인트 올랐다. 월스트릿저널(WSJ)은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직접 일하는 대형 프라이머리뱅크 23곳의 전망을 분석한 결과 18곳이 경기 침체를 예상했다고 보도했다. WSJ는 “월가에서는 연준이 투자자와 소비자의 경제적 타격을 덜기 위해 금리를 낮출 것이라는 전망이 주류”라며 “이에 따라 미국 경제가 올 상반기 짧은 침체에 돌입한 뒤 연말이 되기 훨씬 전에 벗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침체의 깊이는 얕아도 그로 인한 고통이 과거 일반적인 침체 때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WSJ는 일반적으로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침체의 고통을 주로 받았던 것과 달리 이번 침체는 고소득층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이례적인 형태가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부유층(Rich)과 침체(recession)를 합성해 ‘리치세션(Richcession)’으로 불리는 이 같은 침체 양상은 저소득층이 집중된 대면 직종에서 인력 부족으로 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는 반면 고소득층은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가격 급감에 시달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실제 연준에 따르면 소득 하위 25%의 11월 임금 상승률은 7.4%로 물가 상승률(7.1%)을 웃돈 반면 상위 25%의 임금 상승률은 4.8%에 그쳤다. 자산 기준 하위 20%는 지난해 들어 3분기까지 자산이 17% 증가한 반면 상위 20%는 같은 기간 7.1%가 되레 하락했다. WSJ는 “최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아마존 등의 정리해고도 대부분 사무직 직원들이 대상”이라며 고소득자들에게 경기 둔화의 타격이 집중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가 짧은 침체 후 곧 정상 수준으로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데이비드 켈리 JP모건애셋매니지먼트 최고글로벌전략가는 “경제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형태(economic cliff)가 아니라 늪으로 미끄러져 가는 형태(economic swamp)가 될 것”이라며 “이는 악화된 경제가 늪 밖으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경제 매체 마켓워치는 이를 ‘늪지대 침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켈리 전략가는 이런 판단의 배경에 대해 “완만한 경기 침체는 추가 수요를 많이 창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며 “무엇보다 지난 경기 침체와는 달리 이번에는 대규모 재정 부양이 없을 확률이 크다”고 설명했다.
무디스 애널리틱스가 내놓은 경제 시나리오는 ‘슬로세션’이다. 마크 잰디 수석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경제가 침체에 빠지지는 않는 대신 2024년까지 장기적인 악화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며 이 전망이 일반적인 연착륙 전망과 다른 점은 침체를 피하면서도 긴 시간 동안 경제적 고통이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소비자 입장에서 경기 악화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무디스는 평했다.
얕은 침체나 슬로세션은 모두 연준이 경제가 망가지기 전에 금리 인상을 철회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전제로 한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총재는 이 같은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경고했다. 그린스펀 전 총재는 이날 공개된 인터뷰에서 “경기 침체를 피할 수 있도록 연준이 정책 기조를 뒤집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경기 침체가 가장 가능성 있는 결과”라고 지적했다.
<뉴욕=김흥록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