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보리가 밥상에서 사라졌다. 어린 시절엔 보리밥을 무시로 먹었다. 특히 여름이면 제육볶음에 양배추쌈과 보리밥이 특식 노릇을 톡톡히 했다. 보리는 비율이 높지 않아도 밥에서 쌀을 받쳐주는 조연으로 제 역할을 충실히 했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쌀과 달리 보리는 표면이 살짝 꺼끌거리며 알곡도 탱탱해 두 곡식 사이의 질감 대조가 즐거웠다.
특히 보리 알갱이의 가운데 난 줄을 이 사이에 넣고 씹어 반으로 가르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런 보리가 어느 순간 밥상에서 사라졌다. 1970년대만 해도 73만헥타르(㏊)에 달한 재배 면적이 50년만에 5%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마저도 소비가 잘 안 되어 수확철이면 처리에 어려움을 겪는다. 알곡으로서의 소비 기반도 사라졌지만 가공식품으로서도 마땅한 활로를 못 찾고 있다.
그런 가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귀리가 보리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려 버렸다.‘슈퍼 푸드’의 인기 속에서 수입 및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귀리가 그렇게 우수한 식품인가? 영양의 측면만 놓고 본다면 그렇다. 고기, 우유, 계란 같은 동물성 식재료의 단백질을 대체할 수 있는 식품으로 대두에 이어 귀리가 꼽힌다. 도정한 귀리 알곡의 단백질 함유량은 12~24%로 곡식 가운데 가장 높다.
◇가공 안 하면 먹기 힘든 ‘귀리’
그래서 귀리가 보리의 기반을 허물어트릴 정도로 훌륭한 곡식일까. 쉽게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일단 가공성이 보리와 막상막하를 겨룰 정도로 썩 좋지 않다. 밥에 흔히 두어 먹었던 시절의 보리는 압맥이나 할맥 등 미리 익혀 가공한 것이다.
쌀과 같은 속도로 익지 않으므로 보조를 맞추기 위한 조치를 미리 취한 것인데, 귀리 또한 딱딱해 알곡을 그대로 익히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미리 가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어 맛보다 편리함에 더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자리 잡았다. 제품군 전체를 보면 귀리라는 곡식의 맛을 제대로 품고 있는 경우가 드물어진 것이다.
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가. 바로 귀리가 ‘오트밀’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서양 아침 식사의 주 메뉴 가운데 하나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블루베리, 등 푸른 생선 등과 더불어 슈퍼 푸드에 속하는 식재료를 아침에 먹을 수 있다니! 그에 비해 보리는… 초고추장과 열무김치에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이다.
그러나 아침 식사용 귀리 가공품의 세계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맛과 질감이 가난했던 시절의 풀죽이나 동물의 사료에 가깝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는 새 맛없음을 참고 귀리를 먹어 왔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아침에 간편하게 슈퍼 푸드를 먹는다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게 녹록하지 않듯 귀리를 맛있게 먹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귀리는 어떤 곡식인가. 이왕 운을 뗀 김에 보리와 좀 더 비교해 살펴볼 수 있다. 일단 가운데에 줄이 가 있다는 측면에서는 둘이 닮은 가운데 귀리의 알곡이 좀 더 길고 뾰족하다. 한편 통귀리를 익히면 보리보다는 알곡 자체의 찰기는 좀 덜하지만 서로 끈끈하게 더 잘 달라 붙는다.
그런데 정말로 통귀리를 익혀서 맛을 보았다고?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은근과 끈기의 소유자로서 박수 갈채를 받아야 마땅하다. 워낙 단단한지라 쌀로 밥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냄비에 15~20분이면 흰쌀로 밥을 지을 수 있지만 통귀리는 원하는 질감에 따라 30~4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까지 삶아야 편하게 먹을 수 있다.
이다지도 조리하기 어려운 곡식인 귀리가 대체 어떻게 아침을 위한 간편식으로 자리 잡았나. 앞서 살짝 언급했듯 미리 가공을 거친 덕분이다. 아니, 사실은 ‘덕분’인지 ‘탓’인지 살짝 헷갈린다. 대체로 편리함을 위해 곡식을 작살 내놓았기 때문이다.
맞다, 정말 문자 그대로 알곡을 작살낸 게 우리가 편하게 먹는 귀리의 대부분이다. 심지어 살펴보면 보리와 가공 방식조차 같다. 밥을 지을 때 편하게 섞어 먹을 수 있도록 보리를 쪄 압맥(알곡을 눌러 가공했다)이나 할맥(알곡을 누른 뒤 쪼개 가공했다)을 만들듯, 귀리도 빨리 익을 수 있도록 알곡을 찐 뒤 누르거나 쪼개어 제품화한다.
◇가공할수록 맛은 떨어져
그리고 귀리의 가공은 맛과 반비례한다. 편하게 먹기 위해 가공을 많이 할수록 맛은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 최전선에 바로 ‘인스턴트 오트(instant oat)’가 있다. 명칭처럼 즉석에서 먹을 수 있도록 귀리 알갱이를 최대한 납작하게 누르는 것으로 모자라 빻아 버렸다. 용기에 담겨 있어 컵라면을 닮았지만 뜨거운 물을 부어도 제대로 된 음식처럼 탈바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다.
가장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제품이다 보니 귀리와의 첫 만남을 나쁜 기억으로 전락시키는데도 크게 한 몫 한다. 숙박시설의 아침 뷔페 차림 등에서 용기가 예뻐서, 혹은 호기심에 시도해보았다가 밍밍한 맛에 실망한 경험이 있는가. 귀리도 곡식의 일종이라 알고 있는데 용기 안의 봉지를 뜯으니 골판지 부스러기 같은 게 쏟아져 나와서 당황하지 않았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귀리보다 최대한 빨리 익는 음식으로 가공해보겠다는 인간의 욕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인간이 귀리를 망쳐 놓은 것이다.
두 번째로 빨리 익는 ‘퀵 오트 (quick oat)’도 인스턴트와 별 차이는 없다. 아니, 그냥 뜨거운 물을 붓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익지 않아 손수 끓여야 하므로 어쩌면 인스턴트 오트보다 더 나쁜 식재료일 수도 있다. 오트밀과 물을 1:2의 비율로 냄비에 담아 중불에 올린 뒤,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 약불로 줄이고 저어가며 부드러워질 때까지 1분 정도 더 익힌다. 맛을 보면 ‘전생에 내가 당나귀였던가?’라는 의구심이 들더라도 너무 괘념치 말자. 고생해서 끓여도 원래 그런 맛과 질감이니까.
당나귀가 된 듯한 기분은 한 단계 위의 제품인 ‘올드 패션드 오트(Old Fashioned Oat)’로 업그레이드 시킨다고 해서 크게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올드 패션드’라는 이름마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예전에는 이처럼 알곡을 납작하게 누르는 수준에서 귀리 가공을 끝냈다.
이만하면 충분히 가공을 했다고 믿었고 심지어 조리도 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 아니 서양인들의 성질이 점점 더 급해지다 보니 귀리를 좀 더 가공했고 그나마 멀쩡한 것에 ‘구식(Old Fashioned)’라는 딱지를 붙였다. 5분도 시간을 들여 조리할 의향이 없어 적절한 음식으로서 기준 미달인 수준으로 가공했다면 아침 끼니를 위한 식재료로는 엄밀히 말해 자격이 없는 것 아닐까.
맛을 볼모로 편리함만을 좇는 귀리의 세계에 환멸을 느낀다면 다음 단계의 가공품인 ‘스틸 컷 오트(Steel Cut Oat)’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스틸 컷 오트는 귀리의 알곡을 누르는 대신 이름처럼 철제 칼날로 토막을 내 조리 시간을 줄인다. 아일랜드에서 유래한 가공법이라 ‘아이리시 오트’라고도 불리는 스틸 컷은 조리 시간을 알곡에 비해 획기적인 수준인 10~20분으로 줄이면서도 질감과 맛을 최대한 살렸다. 덕분에 슈퍼 푸드에 걸맞은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획기적’으로 조리 시간을 줄여도 10분은 걸린다는 말이니, 출퇴근하느라 바빠 아침을 거르며 사는 직장인의 주중 아침 메뉴로는 적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미리 끓여 시럽과 잼에 곁들여
그래도 적절한 오트밀의 맛을 보고 싶다면? 다음의 조리법을 따라 끓여보자. 굉장히 간단하지만 반전은 있으니, 먹기 전날 밤 미리 준비해 귀리를 불려 줘야 한다. 일단 스틸 컷 오트와 물을 1:4의 비율로 준비한다. 참고로 스틸 컷 오트 1컵은 170g이며, 여기에 4배의 물을 더해 끓이면 4인분의 오트밀이 된다.
일단 물 3컵을 냄비에 담고 중불에 올려 끓으면 귀리와 소금 1자밤을 더해 잘 휘저어 섞고 뚜껑을 덮어 그대로 밤새 둔다. 아침에 남은 물 1컵을 더해 불은 귀리를 중간 센불에서 원하는 정도로 익을 때까지 4~6분 익힌다. 말이 좋아 오트밀이고 사실 귀리죽이므로 눌어 붙거나 타지 않도록 끓이는 동안 계속 저어준다. 밥을 뜸들이듯 불을 끄고 5분간 두었다가 먹는다.
참고로 이처럼 미리 밤새 불리지 않을 경우 스틸 컷 오트 또한 길게는 40분까지 끓여야 먹을 수 있다. 인터넷 오픈마켓에서 ‘스틸 컷 오트’로 검색하면 해외 직구를 포함해 높은 가격의 수입품이 대부분인데, 검색 옵션을 조정해 이들을 모두 치우고 나면 부담 없는 가격의 국내 가공품이 모습을 드러내니 현명한 소비를 위해 참고하자. 그래 봐야 더도 덜도 아닌, 그저 토막 낸 통귀리를 무작정 비싸게 살 이유는 없다. 오트밀은 물 대신 우유로 끓여도 좋고(다만 물보다 빨리 끓으니 타지 않도록 주의한다), 메이플 시럽이나 계피 가루, 사과잼 등이 특히 잘 어울린다.
토막을 낸 귀리도 이처럼 품을 들여야 제대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통귀리는 아침 메뉴로 권하고 싶지 않다. 대신 우리에게는 밥이 있다. 보리처럼 쌀과 귀리를 9:1의 비율로 섞으면 요즘과 같은 압력 전기 밥솥의 시대에 고소함와 질감이 색다른 별미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다.
아니면 요거트 등에 섞어 먹을 수 있는 구운 통귀리도 있다. 오븐에 구워 고소한 귀리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데, 대체로 괜찮은 가운데 종종 딱딱한 알곡이 도사리고 있어 이가 약한 이들은 조심하는 게 좋다.
귀리를 밥에 두어 먹는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또 다시 회의하게 된다. 이럴 거라면 대체 보리는 왜 식탁에서 사라져야만 했을까? 귀리는 분명히 맛있는 곡식이지만 지금껏 살펴보았듯 조리의 편의를 위해 가공한 제품이 대세인지라 제대로 음미하기가 어렵다.
다만 서양의 아침 메뉴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왔기에 우리에게 새롭게 보일 가능성이 있을 뿐, 소위 ‘본연의 맛’을 찾아 통곡식으로 거슬러 올라오면 존재의 의미가 크게 두드러져야 할 이유가 없다.
귀리 자체로는 물론이거니와 보리와 비교해서도 그렇다, 오트밀이 결국은 빻은 귀리에 물을 붓고 끓인 죽에 불과하다면 왜 보리로는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없을까? ‘오트밀’은 그럴싸해 보여도 ‘보리죽’은 그렇지 않은, 일종의 이미지 문제가 있기 때문일까?맥주나 일본의 도라야키를 닮은 빵 외의 활로를 보리에게 찾아줄 필요가 있고, 열쇠의 한 조각은 보리를 몰아낸 귀리가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