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최고경영자(CEO)가 1997년부터 매년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주주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은 이젠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경제진단이 됐다. A4용지 3, 4장에 지난 1년 간의 사업현황이 정리돼 있는 것은 기본이고 올해 경제 상황을 반영한 사업 방향과 한계, 리스크에 대한 대응책까지 가감없이 담고 있어서다. 뉴욕증시 상장 첫해부터 시작된 베조스의 연례 편지는 회사 신뢰도를 크게 높이며 지난해 아마존이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올라서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다.
그렇다면 이달부터 본격적인 정기 주총 시즌에 들어간 우리나라 주요 대기업 CEO들은 어떤 식으로 주주들에게 신뢰를 주고 있을까. 올해는 상당수 기업들이 창업주에서 후대로 경영 배턴 터치가 이뤄진 첫해인 만큼 ‘한국판 베조스’가 탄생할지 주목된다.
5일 재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연초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사망으로 창업주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후대 오너들이 이달부터 본격적으로 정기 주총을 맞는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은 데다, 현업에서 계획적으로 실무를 쌓고 그룹 총수에 오른 첫 세대여서 투자자에게 보다 양질의 친화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그럼에도 베조스나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처럼 주주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며 적극적인 정보와 의견을 전달하는 오너는 이날 현재 1명도 없다. 주총을 열기 앞서 이사회를 통한 주총 일정과 의안 사안, 전년도 실적 등만 소극적으로 공개한 상태다. 국내 유가증권 시장에도 외국인 투자 비중이 전체 시가총액의 40%에 이르면서 해외를 중심으로 각종 요구 서한이 기업들에게 전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나마 예년과 차이 나는 부분은 전자투표제 도입, 비상장사 사외이사 선임, 자율적 재무구조 개선, 자사주 매입ㆍ소각 등 주주친화책을 다소 펴고 있다는 점이다. 소액주주의 주총 참석률을 높이는 수단인 전자투표제의 경우, 삼성전자 현대차그룹(상장한 전 계열사)이 올해 도입하기로 했다. SK 롯데에 이어 이들 회사까지 합류하면서 LG를 제외한 5대 그룹 전부가 전자투표제를 주총에서 사용한다.
다만 젊은 오너들은 베조스처럼 구체적 서한 형태는 아니지만 장기적인 사업방향만큼은 주주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드러내는 추세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퇴진으로 그룹 경영 전면에 본격적으로 나선 정의선 수석 부회장은 지난해 말 ‘CEO 인베스터 데이’를 열어 전동화 자율주행 신에너지 등의 분야에 향후 5년간 20조원을 투자해 미래사업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올해로 삼성그룹의 경영 전반을 챙긴 지 7년째를 맞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뇌물공여 및 횡령 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창립 50주년 기념 영상을 통해 “열정과 자신 있는 사업 중심으로 마음껏 꿈꾸고 도전해 100년 기업이 되자”고 밝혔다.
올해 두 번째 주총을 맞는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체제 굳히기를 마무리하고 고객 가치 차별화라는 화두를 생산 현장에서 던졌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임직원들의 책임 있는 의사결정을 유도한다는 취지에서 일종의 성과보상제인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 제도를 이번 주총 시즌에 도입키로 했다.
반면 부친 사망 이후 첫 주총을 맞는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비수익 사업 정리, 지배구조 투명화 등 전향적인 주주친화책을 내세우고 있지만, 남매간 경영권 분쟁을 겨냥한 것이라는 부정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항공 대표이사 사장으로 올라선 2017년 이후에도 큰 변화를 주도하지 못한 데다, 반 조원태 진영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전자투표제 등은 도입하지 않고 있어서다. 또 대한항공 실적 하락, 사업 다각화 실패에 따른 그룹 재무구조 악화 등을 베조스처럼 실패를 교훈으로 삼기 위한 분석이나 자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 박관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