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거나 매달아 보관해야
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어
냉동 후 갈아 먹는 방법도
설익은 것 토치 불에 굽거나
버터^흑설탕과 졸이면 달콤
이사를 계획하고 십 년 넘게 쌓인 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여섯 살 때의 유치원 생일잔치 사진이었다. 매월 원생들을 대상으로 벌였던 생일잔치는 행복한 일이었다. 그 달에 생일이 끼어 있는 어린이라면 스물 네 가지 색깔 크레파스를 선물로 받고, 한복에 종이 왕관 차림으로 하룻동안 주인 행세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바나나였다. 스티로폼 일회용 접시에 담아 나눠 주는 과자와 과일 가운데에 가장 덩치가 컸던 바나나는 당시 무척 귀한 과일이었다. 그래서 생일잔치에서도 한 명당 고작 3분의1쪽씩만 돌아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도 바나나는 여전히 귀했으니 제주도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희소성 덕분에 바나나는 1980년대에 귤과 더불어 제주도의 양대 과일이자 수입원의 지위를 누렸지만 1980년대 말로 접어들며 우루과이라운드에 의해 들어온 수입산에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1998년에 자취를 감췄다. 이제 바나나는 흔하디 흔해서 딱히 좋아한다고 꼽아도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과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바나나의 가치가 완전히 무의미해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나름 독특한 입지 덕분이다. 바나나는 사과나 귤처럼 아삭함이나 신맛 등으로 상큼함과 신선함을 선사한다기보다 포만감을 주는 과일이다. 따라서 여느 과일과 달리 후식보다 간식으로 더 잘 맞는다. 게다가 두꺼운 껍질이 과육을 보호해 주니 가지고 다니기가 덜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굳이 유기농이나 무농약 바나나를 찾아 먹을 명분도 다른 과일에 비해 훨씬 적다(실제로 껍질 덕분에 바나나는 농약 등을 써 기르는 통상 농법 작물 가운데 가장 안전한 것으로 꼽힌다). 당연히 여러 품종이 존재하겠지만 현재 열대지방에서 재배되어 세계로 널리 퍼지는 바나나의 대다수는 ‘캐번디시’ 품종이다. 1903년부터 대량 경작에 들어갔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50년대 주요 품종이었던 ‘그로미셸’이 파나마병에 굴복하면서 왕좌(?)를 이어받았다.
‘맛의 전성기’에 맞춰 바나나 먹으려면
워낙 싸고 흔한 과일이니 깐깐하게 고를 필요는 없지만, 집에 꾸준히 두고 간식으로 먹으려면 약간의 요령과 부지런함은 필요하다. 무엇보다 바나나가 빨리 또 계속 익는 과일이기 때문이다. 바나나의 숙성이란 전분이 당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대부분의 과일과 달리 수확 후에도 계속 익어 단맛이 강해지는 한편 물러진다. 그래서 생산지에서는 껍질이 완전히 풀색일 때 수확해서 익지 않도록 저온에서 밀봉상태로 운송한 뒤 에틸렌 가스를 쏘여 전분의 당 전환 과정을 활성화시킨다. 이 전체의 과정을 감안하면 매대에서 노란색이 이미 완연한 바나나라면 이틀에서 나흘 이내에 맛의 전성기를 지나 흐물거리기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집에 두고 먹을 바나나를 처음 고를 때에는 껍질에 풀색이 조금 남아 있거나 노란색이 썩 진하지 않은, 약간 덜 익은 것으로 시작한다.
딱히 신경을 써 보관할 필요는 없지만 일단 비닐 포장을 뜯고, 밑부분이 더 빨리 멍들거나 무르지 않도록 뒤집거나 세탁소의 철사 옷걸이 등에 매달아 둔다. 이틀, 길게 잡아도 사흘이면 풀색이 완전히 가시고 노란색이 돌기 시작하니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껍질의 노란 색이 진해지고 검은 점이 콕콕 박히기 시작하면 가장 먹기 좋을 때이다. 단맛이 중심을 잡으면서도 신맛이 살짝 남아 균형을 잡아주고, 질감도 너무 미끈거리거나 무르지 않다. 이제 껍질에 검은색의 비율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면 뒤를 이을 바나나를 한 송이 사와 대기시킨다.
핵심은 먹고 있는 바나나가 너무 익어 버리기 전에 살짝 덜 익은 바나나를 대기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설사 세대교체의 시기를 놓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만약 먹고 있는 바나나가 너무 빨리 익어 버렸다면 냉장 혹은 냉동 보관으로 먹을 수 있는 기간을 늘릴 수 있다. 냉장 보관하면 전분이 당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극적으로 느려지면서 바나나가 며칠은 ’확 가 버리지’ 않고 버틴다. 껍질은 완전히 시커매지고 과육도 거무스름해져 식욕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맛만은 생김새만큼 나쁘지 않다. 한 송이를 사서 먹다가 한두 개 정도 남았을 때 보관법으로 권한다. 한편 의욕을 가지고 사다 놓아서 열심히 익어가나 먹기가 귀찮다거나 하는 이유로 많이 익은 바나나가 많이 남았다면 냉동보관을 선택한다. 전부 껍질을 벗겨 쟁반이나 접시에 붙지 않도록 간격을 좀 떼어 놓은 채로 냉동실에 넣고, 딱딱하게 얼면 밀폐용기 등에 옮겨 보관한다. 적어도 3개월은 더 두고 먹을 수 있는데, 다만 해동하더라도 생과일처럼 원상복귀는 어렵고, 곤죽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상심할 필요는 없다. 심지어 얼린 바나나도 저만의 쓰임새가 있다. 일단 쉐이크(혹은 스무디)의 바탕으로 쓰는 것이다. 우유나 물에 각종 과일, 요거트, 더 나아가 단백질 파우더 등을 더해 블렌더로 갈아 마시는 보충식에서 바나나의 역할은 중요하다. 갈면 걸쭉한 액체가 되어 버리므로 쉐이크의 ‘몸통’을 이뤄 포만감을 줄 뿐만 아니라 위장에서 천천히 흡수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게다가 바나나는 단백질 보충제 가운데 가장 흔하면서도 먹기에 편한 초콜릿 맛과도 잘 어울린다. 쉐이커 등에 냉동 바나나를 한 개 담고 전자레인지에서 해동될 때까지, 1,2분 돌린 뒤 나머지 재료를 더해 블렌더로 매끈하게 갈아 마신다. 여름이라면 약간 덜 해동시켜 입자가 남도록 갈면 시원하면서도 아삭하게 알갱이가 씹혀 계절에 잘 어울린다.
바나나 따뜻하게 먹으려면
냉동 및 냉장 보관이 푹 익은 바나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준다면 불은 살짝 덜 익은 것의 잠재력을 미리 끄집어내 준다. 바나나를 익혀 먹는다는 이야기인데, 조리 과정에서 뭉개지지 않고 버틸 수 있으니 딱 알맞게 익은 지점의 한두 발짝 앞까지 다가온, 풀냄새를 살짝 풍기는 것을 써야 한다. 집에서 시도할 수 있을 만큼 손쉬운 두 가지 조리법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바나나의 표면에 설탕 옷 입히기이다. 바나나를 수직으로 반 갈라 접시에 올리고 표면에 설탕을 솔솔 뿌린다. 그리고 거리를 좀 넉넉하게 두고 토치의 불꽃으로 그을려 막을 입힌다. 설탕이 녹았다가 굳어 막을 입혀 주는데, 바삭해서 바나나의 질감과 좋은 대조를 이룰 뿐만 아니라 가는 쓴맛의 꼬리가 살짝 붙어 있는 단맛이 살짝 덜 익은 바나나에 맛을 한 겹 더 씌워준다. 토치는 식탁용 가스레인처럼 부탄가스를 연결해 쓰는데, 마트 등에서 쉽게 살 수 있다(여담이지만 토치는 쥐포를 굽는데도 매우 좋은 도구이니 하나쯤 갖춰 둘만하다. 물론 비싸지도 않다).
두 번째는 좀 더 본격적인 조리다. 설탕을 그을린 캐러멜의 맛을 바나나에 씌워준다는 접근 방식은 같다. 단단함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익은 바나나 큰 것 두 개를 준비해 껍질을 벗기고 세로로 한 번, 가로로 한 번씩 썰어 4등분한다. 지름 25㎝짜리 팬을 중불에 올려 버터 55g을 녹인 뒤 흑설탕 100g을 더한다. 1분쯤 뒤 설탕이 버터에 녹아 어우러지면 썬 면이 팬의 바닥에 닿도록 바나나를 올려 1분30초 익히고, 뒤집어 1분30초 더 익힌다. 익히는 동안 바나나에 숟가락으로 소스를 계속 끼얹어 준다. 어른이라면 마무리 과정에서 럼을 50㎖쯤 끼얹어 날아갈 때까지 끓이면 열대의 향이 배어 더 맛있어진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접시에 담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으면 그럴싸해 보이는 디저트인 ‘아이스크림 선대(icecream sundae)’가 된다. 바나나를 익히면서 계피를 통째로 더해 향을 보태줘도 좋다.
국산 바나나 맛보려면
열대 지방의 과일인지라 그러려니, 하고 먹지만 혹시라도 국산을 맛보고 싶다면 기회는 있다. 사실은 국산 바나나가 2006년을 기점으로 부활했다. 묘목은 이미 사라진 가운데 식물원에 관상용으로 남아 있던 모주, 즉 어미나무를 발견해 높이(3척 반)에서 착안해 이름을 ‘삼척반’이라 붙이고 제주도로 가져와 재배를 시작한 것이다. 다만 병충해에 약해 생산량이 들쭉날쭉한 단점이 있어 대체 품종을 개발하는 가운데, 이제 ‘송키밥’이라는 품종이 검증을 마쳤다. 제주도 방언으로 ‘채소’를 뜻하는 ‘송키’에 밥을 붙여 지은 이름이다. 2016년에는 경남 산청에서 재배를 시작해 2018년, 국내 최초로 육지 바나나가 출시되었다.
마침 지난해 통영 여행길에서 들른 휴게소의 지역 특산물 매장(나물부터 과일, 떡까지 다양하고 맛있는 식재료를 좋은 가격에 살 수 있다)에서 우연히산청 바나나를 맛 볼 수 있었다. 국산인데 제주도산도 아니라니 신기한 마음에 직원에게 물어보니 제주도의 바나나 재배 경험자가 기술을 전수해 재배 중이라는 답을 들었다. 호기심에서라도 한 번쯤은 먹어볼 만하고, 열대 바나나처럼 안 익은 채로 건너와 후숙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널리 유통되는 수입 바나나와 굳이 비교하자면 완전히 익지 않았을 때에도 과육이 조금 무르다.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면 특히 파프리카를 재배했던 농가, 발전소 폐열을 활용할 수 있는 화력발전소 인근 지역 등을 바탕으로 재배가 점차 늘고 있지만 한때 명맥이 끊겼던 상황이다 보니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라고 한다.
포만감을 주는 바나나는 여느 과일과 달리 후식보다 간식으로 더 잘 맞다. 하지만 쉽게 익어서‘맛의 전성기’를 맞추려면 약간의 요령과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바나나를 불에 구우면 바나나의 잠재력이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