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 음식이라 생각 안 해
“전문점 못 버티고 사라져
“염분 적고 소화도 잘 돼”
“수프 예찬론자 점차 늘며
“건강한 한 끼 식사로 떠올라
일본 도쿄 거리를 걷다 보면 커피잔이 그려진 간판들 사이로 종종 수프잔을 볼 수 있다. 작은 컵에 소담스럽게 담긴 수프 한 잔. 일본의 유명한 수프 프랜차이즈 ‘수프스톡 도쿄’다. 1999년 8월 1호점을 낸 수프스톡은 도쿄를 중심으로 현재 전국에 60개 가까운 매장을 운영하며 인터넷 판매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메뉴에 있는 수프의 종류만 89종(지점마다 차이가 있다). 옥수수, 호박, 토마토 등 낯익은 수프부터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형 수프, 시원한 냉수프, 랍스터를 넣은 프랑스식 비스크, 누룽지가 담긴 중화풍 수프, 카레를 첨가한 일본식 수프까지, 전 세계의 수프들을 맛볼 수 있다. 바쁜 출근길 수프 한 컵을 사서 후루룩 마시며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테이블에 앉아 빵과 함께 끼니를 때우는 사람도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건 스몰 사이즈 수프 2컵에 밥 또는 빵을 곁들이는 950엔짜리 메뉴다. 매콤한 수프 하나, 크리미한 수프 하나, 여기에 빵을 찍어 먹으면 한파에 얼었던 몸이 녹진하게 풀리면서 근사한 겨울 저녁이 완성된다.
국내에는 왜 수프 전문점이 없을까. 한국의 식탁에 수프가 모습을 드러낸 지는 수십 년이 지났지만 수프는 여전히 ‘적응 중’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프를 음식이라고 생각 안 해요.” 최연정 셰프의 말이다. 2016년까지 홍대에서 프렌치 비스트로 ‘르끌로’를 운영한 그는 동생 최지민 작가와 함께 ‘수프 한 그릇’(로지 발행)이라는 책까지 낼 정도로 수프예찬론자다. “워낙 수프를 좋아해서 메뉴에 계절 수프를 넣었는데 반응이 별로 없더라고요. 다른 음식에 곁들여서 나오는 건 괜찮지만 따로 돈을 지불할 음식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수프의 위상은 확실히 애매하다. 각종 야채와 고기를 푹 우려낸 국물 음식을 수프로 총칭한다면, 한식에서 수프를 대신할 만한 것은 이미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가루 수프의 절대적인 지배력도 한몫 한다. 수프를 이야기할 때 여전히 돈가스에 앞서 나오는 노르스름한 크림수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에서 이만큼 진화가 안 된 서양 음식도 드물다.
뛰면서 즐기는 수프 한 잔의 여유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7년 서울랜드가 외식사업에 처음 진출하며 야심차게 내놓은 ‘크루통’은 8종의 수프를 내세운 수프전문점이었다. “바쁜 일상으로 아침식사를 거르기 쉬운 직장인”들을 겨냥했지만 지점 확대에 실패하고 사업을 접었다.
이 밖에도 가로수길 ‘아이러브스프’, 이태원‘컵앤볼’, 연남동 ‘수프맨’등 수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가게들이 종종 등장했지만 몇 년 가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현재 수프 전문점이라고 불릴 만한 곳은 전국에 서너 곳이 채 안 된다.
그중 가장 오래된 곳이 경기 고양시의 ‘수피’다. 2012년 문을 연 이래 수프 가게들의 잦은 부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수피’는 브로콜리 수프, 양송이 수프부터 미트볼 수프, 클램 차우더, 프렌치어니언 수프, 중동 스튜요리인 에그인헬, 아기들을 위한 이유식 수프까지 30종에 가까운 수프를 판다. 남편과 함께‘수피’를 운영하는 이승숙 사장은 “젊은 시절 아픈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수프 요리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한다. “수프는 염분이 적고 소화가 잘돼 아픈 사람한테 이보다 좋은 음식이 없어요. 처음엔 젊은 사람들을 겨냥했는데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꾸준히 찾으시더라고요.”
처음 시작할 때 국내에 수프 전문점이 하나도 없어서 “대박이 날 줄 알았다”는 그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찾는 수프가 한정적이 라는데놀랐다. “크림수프나 양송이수프가 제일 잘나가요. 그래서 처음보다 종류를 좀 줄였어요. 가격도 밥보다 비싸면 안 돼요. 무엇보다 수프만 먹으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다른 음식을 같이 팔아야 해요.”
부산 서면 카페거리의 ‘숩 65’도 수프 전문점을 표방하지만 샌드위치, 버거와 세트를 이룬 메뉴가 가장 대중적이다. 이승숙 사장은 수프의‘부진’에 대해‘따끈’과 ‘뜨끈’의 위상차이를 들었다. “수프는 따끈하잖아요. 펄펄 끓는 뚝배기의 뜨끈함을 못 이기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수프는 아직 마니아 음식이에요.”
가장 최근 문을 연 서울 마포구 ‘수퍼’는 이 마니아 위주 시장에 던진 야심 찬 도전이다. ‘수퍼’의 권소희 사장은 출퇴근길 허기에 방황하던 직장인 시절을 떠올리며 수프전문점을 열었다. “회사에서 집까지 2시간 거리라 집에 도착하면 밤 9, 10시였어요. 저녁 차려 먹긴 애매하고 회사에서 먹고 출발하는 건 싫고$ 죽이나 프라푸치노 등을 먹어 봤는데 성인이 길거리에서 눈치 안 보고 먹을 수 있는 건 커피밖에 없더라고요.”
그가 꿈꾼 것은 ‘뛰면서 즐기는 수프 한 잔’. 바빠서 식사를 챙길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전단지 받듯이 수프를 한 컵씩 가져가 는 풍경이다. 메뉴에는 토마토 바질 크림, 레몬 치킨 오르조, 칠리 콘 카르네 등 6종의 수프가 있다. 크림수프처럼 익숙한 건 일부러 뺐다. “수프의세계가 얼마나 다채로운 지 알리기 위해서”다. “모든 수프에 밀가루를 볶은 루(roux)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니에요. 저희 수프 중 루가 들어가는 건 두 종류뿐이에요. 수프에 대한 강한 고정관념도 국내에 수프가 자리잡지 못하는 요인인 것 같아요.”
냉동재료나 첨가물 없이 각종 재료를 갈아 곰국 끓이듯이 뭉근히 끓여 만든 수프는 영양과 편이성에서 다른 국물 음식의 추종을 불허한다. 수프의 대체 불가한 매력이 증명되면 한국에도 수프 전문점의 시대가 열릴까. “최근 1인가구가 늘고 혼밥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건강하고 간편한 한 끼 식사’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수프는 이제 시작 아닐까요?” <황수현 기자>
‘수퍼’에서 판매하는 클램 차우더. 한국에 수프가 소개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수프 전문점은 전국에 서너 곳이 채 안 된다. <수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