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쿠오카 하카타역에서 특별한 열차를 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달리는 관광열차 유후인노모리(유후인의 숲)다. 이름처럼 객실 내부도 온통 따뜻한 갈색 나뭇결과 초록색 나뭇잎으로 꾸며져 있다. 오이타현을 4시간 가량 돌고 돌아 유후인에 도착하는 노선이다.
평화로운 온천마을, 유후인
유후다케(유후산,由布岳)가 보듬고 있는 작은 마을 유후인은 일본 오이타현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다. 원천(源泉)만 약 900개로 일본 2위를 자랑하는 만큼 마을 곳곳에서 맑은 온천이 샘솟는다. 유후다케를 마주한 산자락에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일본의 전통 료칸(여관)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걸어서 둘러봐도 충분할 만큼 작은 마을이지만 인력거를 타면 유후인의 한적함이 배가 된다. 인력거는 관광객들이 다니지 않는 논길, 차가 다닐 수 없는 하천 둑길을 거닌다. 유후다케를 마주하며 달릴 땐 너른 들녘의 품으로 곧장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침대 위에 앉은 듯 통통 튀는 승차감을 30분 가량 즐기면 종착지인 긴린코 호수에 당도한다. 호수 바닥에서 온천과 맑은 물이 동시에 샘솟는 불가사의와 신비로움 덕에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는 명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해시태그(#)를 붙여 ‘유후인’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장소도 이곳이다. 맑은 호수에 비친 데칼코마니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거린다.
‘인간 실격’으로 유명한 일본 근대문학의 거장 다자이 오사무의 팬이라면 유후인만큼 탁월한 선택도 없다. 그가 도쿄에서 하숙했던 건물 ‘벽운장(碧雲莊)’ 원형을 그대로 옮겨놓은 ‘유후인 문학의 숲’이 지난 4월 개관했기 때문이다. 기존 벽운장이 있던 도쿄 일대가 개발에 들어가자 이전할 곳을 찾던 중 유후인의 한 료칸 주인이 2억 엔을 부담해 옮겨왔다고 한다. 약 4평의 방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그의 혼을 느끼고자 ‘덕후’의 마음을 안고 찾아갔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 터라 입장할 순 없었다. 창문너머로 본 정갈한 하숙집 풍경에서 글을 쓰는 다자이 오사무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뜨끈한 힐링 도시, 벳부
여유를 즐겼던 유후인을 뒤로하고 차로 약 1시간을 달려 벳부에 닿으면 또 다른 힐링 여행이 시작된다. 벳부는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온천 명소다. 8개의 개성 넘치는 온천마을이 있다. 그 중 수분공급에 탁월하다는 간나와 마을을 거닐었다. 보도의 돌 틈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천 열기만으로도 피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마을 곳곳에 마련된 발 찜질 체험장엔 관광객들이 북적였다. 뜨끈하게 데운 발을 찬물로 씻어내면 막혔던 혈 자리가 트인 듯 짜릿함이 느껴진다.
활력 증진에 효과적이라는 카메가와 온천마을에선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오리새끼’에 등장한 곳으로, 이상민이 정준영과 ‘궁셔리 초저가 일본여행’에서 함께한 검은 모래 찜질이다. 유카타를 입고 뜨거운 온천수로 데운 약 42도의 검은 모래 속에 파묻히면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온천욕과 같은 효과다. 게다가 야외여서 파란 하늘과 벳부만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단 화상에 주의해야 한다. 찜질이겠거니 생각하고 뜨거움을 참다가 갑자기 살갗이 익는 느낌이 들어 무거운 모래무덤을 단숨에 뛰쳐나왔다. 샤워시설에서 차가운 물로 씻어내긴 했지만 한동안 벌건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여행에서 음식이 빠질 수 없다. 벳부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은 ‘도리텐’이다. 벳부에서 유래해 오이타현의 향토요리로 자리잡았다. 한국의 치킨과 비슷한 닭튀김이지만 맛은 다르다. 초간장과 겨자를 섞은 소스에 찍어 한입 베어 물면 달짝지근하면서 톡 쏘는 맛과 바삭바삭한 튀김, 부드러운 닭고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한국에 ‘치맥’이 있다면 오이타현에는 ‘도맥’이 있는 셈이다.
풍류를 만끽하는 물의 도시, 히타
벳부에서 열기를 채웠다면 히타에선 풍류를 즐길 차례. 산중 분지에 자리잡은 히타는 예부터 ‘물의 고장’으로 불렸다. ‘지온노타키’ㆍ‘칸논노타키’ 등 자연 폭포가 유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온천마을로 유명한 아마가세 지역의 ‘사쿠라타키’(벚꽃폭포)도 명소 중 하나다. 주변에 흩날리는 물방울이 벚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미터 높이에서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한 마음까지 깔끔하게 씻기는 기분이다.
유서 깊은 도시 히타에는 ‘규슈의 작은 교토’라고 불릴 정도로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번잡하지 않고 조용하다. 특히 일본 전통 가옥이 고스란히 보존된 ‘마메다마치’ 거리에선 기모노를 입은 여인과 일본도를 찬 사무라이를 본다 해도 이질감이 없을 것 같다. 공예품과 기념품을 파는 아기자기한 상점과 식당도 모여 있어 두어 시간 넉넉하게 여유를 갖고 돌아보며 일본의 옛 정취를 음미해도 좋다.
풍류의 정점은 미쿠마 강변에서 즐기는 ‘야카타부네’. 유람선을 타고 가이세키 요리를 즐기는 선상 연회다. 5월 하순부터 10월까지 운항한다. 해질 무렵 강 너머 노을을 바라보며 조용히 시작하는 식사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들뜬 마음으로 끝난다. 연회가 끝나고 다시 선착장으로 복귀할 땐 놀이기구에서 내릴 때처럼 아쉬움이 가득하다. 히타의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다.
<유후인ㆍ벳부ㆍ히타=한설이 PD>
히타의 미쿠마 강에서 바라본 해질 무렵 풍경.
유후인노모리(유후인의 숲) 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