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부터 농사는 천하 대본이라고 했다. 농부는 천하 대본을 직업으로 사는 가장 성스러운 존재라야 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근대 사회에서 농부는 그리 대접을 받지 못하고 유럽 중세시대에 농노 같은 신분이 되어버렸다. 한심한지고…
조부님께서 9마지기 논과 3천 평 땅을 경작하시면서 나를 키우셨으니 농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영농 농부의 삶이 어떤지를 익히 알고 있다. 일은 쉴 새가 없고 비가 안 오면 안 온다고 걱정,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온다고 걱정, 너무 추우면 춥다고 걱정, 너무 더우면 덥다고 걱정, 서리가 일찍 내려도 걱정, 늦게 내려도 걱정 이래저래 걱정이 없이 편한 날이 별로 없이 살았던 기억이다.
그래서 내 장래 직업으로 농사는 첫 번째로 제쳐 놓은 직업이었는데 이제 은퇴를 하고 나서 매년 경작지를 늘여가며 농사를 짓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텃밭 5평으로 시작을 한 농사가 100평으로 늘어났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신선한 야채를 먹기 위해 상추, 파, 쑥갓, 들깨, 고추, 토마토로 시작을 했는데 이제는 다년생 농작물인 도라지, 더덕, 취나물, 참나물이 밭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생활력 강한 갓 농사에 재미가 붙었다.
주인아저씨인 내가 씨를 뿌리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싹이 나고 내가 어디로 옮기던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을 해주면 좋아라 하고 더 잘 자라주어 꼭 보답을 한다. 절대 배신이라는 것이 없고 우리 사회에서 자주 보는 사기라는 것도 없다. 하루 종일 밭일을 해도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안고 잔소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말대꾸하는 법이 없으니 조용해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다.
5월 말쯤이면 농작물들이 많이 자라 농장을 나가면 열병식을 받는 기분이 든다. 만 명이상에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환상에 빠져본다. 도라지 중대가 최 우편, 더덕 중대는 제2진지에, 약쑥 포병대대는 언덕 위에, 취나물은 별동부대 진지에, 상추, 쑥갓 본부중대는 중앙에, 두릅 특수부대는 제1 진지에, 참나물 대대는 최 좌편에 배치를 하고 우뚜 우뚝 뒷편에 서 있는 과일나무들을 영관급 지휘관들이 도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서 뒷짐을 지고 거만하게 사열을 한다. 또 하나 있다. 지휘관은 절대 생사권이 있어서 땅에서 뽑아버릴 수도 있고 좋은 자리로 또는 그늘 자리로 옮길 수도 있다. 잡초라는 적군을 섬멸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는 날이면 베란다에 잘 갖추어진 벤치에 앉자 전군을 독려하면서 맥주 파티를 열 수도 있다.
농사가 생활 수단이 아니니 가뭄이 들어도 좋고 홍수가 나도 걱정이 없다. 늦게 서리가 내려도 좋고 안 내려도 걱정이 없다. 이정도라면 농부는 천하 대본이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파트타임 농사꾼이 되어 행복을 누릴 만도 하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