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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일기 리서치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1-12-17 08:36:48

행복한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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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시인·수필가)

     

하루가 마무리되고 일기장과 마주하게되는 시간이면 하루들이 어찌 그리도 빠르게 저물어가는지, 한 주가 시작되었나 싶은데 금새 주말이다. 늙는 길은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란다. 황혼녘 시속이라 가속화되는 걸로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빚어낸 모순이다. 백신접종 이전에 비해 팽팽한 통제로 시간을 다루려 하지만 느낌의 구상과 심경 흐름은 전에없이 유족하고 넉넉해지고있어 예상밖으로 부조화의 윤택으로 기울고 있다. 

언제나이듯 잠자리에 들기 전 일기장과 마주하게 된다. 하루를 다한 감사와 다음날의 소망을 올올이 자수(刺繡)하듯 새겨왔었다. 한해가 저무는 길목 앞에서 한해를 돌아보는 시간 마련을 하려던 참에 그간에 모인 일기들을 리서치해보기로 했다. 시한없이 흥미진진하게 몇 날 며칠을 두고두고 읽어볼 참이다. 글을 깨우치고부터 써왔던 일기라는 형식의 글들이 세월따라 변화무상을 거듭했다. 국민학교 저학년 일기장에는 ‘오늘 나는’ ‘나는 오늘’로 첫 문장을 반복하면서 써왔던 것도, 방학이 되면 숙제를 겸해서 그림일기로 써왔던 것도 시간의 행간이 빚어낸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어린이가 소녀로 자라가는 와중에 써왔던 일기장엔 풋풋한 내음이 스며 있다. 세상이 온통 분홍이었다가 초록이었다가 원색의 배경 위에 수렴되기도 하면서 성장 기지개가 일기장을 메워가고 있다. 여학교 시절에는 하늘이 맑아도 설레였고 새벽 안개를 만나면 안개 속을 헤집고 싶었던, 세상이 하냥 아름다워 시 속에서 소슬하게 꿈을 모으고 키워왔던 것 같다. 어린 아이에서 소녀로, 물색없이 천진했던 소녀가 숙녀로 가는 어귀에서 육신적으로나 정서 성장의 용트림이 스트레칭으로 꼬여가면서 정체성을 찾느라 무던히도 애썼던 시간들을 일기장에 쏟아붓기도 했었다. 여학생이 여대생으로 가는 길목에서 4.19와 5.16을 겪으면서 군사독재정권 폭정으로부터 내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수탈당하신 비참을 홀로 안으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혹독한 시련의 시간들이 깊고 끈적이는 늪같은 수렁을 멀미하듯 헤쳐나온 과정들이 다큐멘타리로 남겨져 있다. 그토록 부단하게 인내를 키워왔던가 싶을 만큼. 혼미하고 아팠던 시간들을 매일 매일 질기게 붙들면서 때로는 밤을 지새웠던 글들이 고스란히 은유의 적벽가로 남겨져 있다.

젊은 엄마였을땐 옳고 그름의 잣대를 굳건히 잡고 산교육을 몸소 감행하려 했었고, 중년을 넘기면서 인간에게 남아있는 죄성의 고통에 눈뜨임하게 되면서 선과 악, 이원론에 충실한 나머지 지혜로운 여인이기를 촉구했던 대목에다 빨간색 펜으로 ‘내려놓음이 필요함’ 으로 댓글을 달았다. 아이들을 기르고 손주를 만나는 과정들은 값진 유적이라 평가해주고 싶다. 빛바랜 세월로 가리워진 일기장 속엔 같은 실수를 거듭 반복한 적은 있어도 멋쩍었던 순간들을 부인하거나 핑계댄 흔적은 없었다. 시인하고 진즉에 사과하고 수습했던 흔적이 마음에 든다. 

텅빈 하루를 보낸 날의 기록은 아예 없다. 비어있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던 탓에 빈 틈이 보이는 하루는 용납되지 않았으니까. 비워둔채 흘러가는 시간들이 무참하고 한심해서 무엇으로든 가득 채운 하루였어야 했고 일상도 생각도 밀도가 짙어야 했었다. 힘든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무턱대고 안전지대를 배회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던 결과의 열매들과 보람의 행적들이 삶의 길목마다에서 쉼터처럼 여유를 부리고있다. 유난을 부린 흔적들이 새삼 부끄럽고 쪽팔리는 부분들이라서 붉은 펜으로 댓글을 달기도 한다.

아이들이 떠나고 빈둥지를 지키면서 자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겨지고 싶다. 일기를 써내려가는 시간 앞에선 시공을 초월한 자아를 만나고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먼 우주에서 날아온 것 마냥 빈 마음이 된다. 살아온 흔적들이 초월의 경지로 접어들게 해줄 것 같은 기대와는 달리 다른 시각으로 투시해보라는 반추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한 여인의 삶의 기록이기도 하거니와 삶의 여정을 날마다 규명해온 작은 역사서이다. 생을 그토록 준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시점에선 호흡이 멈출 만큼의 고비들을 어찌 그리도 잘 넘겼는지. 여태껏 사뭇 써왔던, 볼품없고 추레한 일기지만 생애의 보람이요, 나를 지켜온 보루요 감추고 싶지 않은 종적이다.

리서치하는 동안 칭찬도 책망도 아닌 격려가 앞선다. 은밀한 참회록이요 새로운 하루들을 위한 교두보였고, 생의 벗님이었고 영원한 붕우유신이었구나 싶다. 남은 날 동안은 꽤 괜찮은 날도, 그리 괜찮지 않은 날도 더는 스스로를 볶아치지 않으며 보듬으리라. 지금껏 찰지게 살아온 것으로 자화자찬하는 부끄러움까지도 감사로 돌리며 일기쓰기를 권면 드리려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 풍경을 배경삼으며 일기장을 리서치하는 꼬소롬한 재미를 함께 느껴보시기를 바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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