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자(시인 수필가)
하루를 다한 늦은 시간이면 세상은 적막으로 고요해 진다. 만상이 안식에 젖어 들고 먼 기적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시간이면 하룻길 여정에서 남겨두고 싶은 잔상들이 기록을 기다리고 있다. 원고지 여백을 채워가는 시간으로 길을 떠난다. 오늘도 이른 아침 마을에 있는 공원을 찾게 되면서 파빌리온에 앉아 산책길을 걷는 발걸음들을 바라 보게 되었다. 모두들 행복해 보인다. 매일 만나지는 사람, 가끔씩 스치게 되는 사람들 모두 다양한 모습들로 다가온다.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 보노라면 문득 내 모습도 보인다. 그리움을 숨기고 있는 모습도 언뜻 보인다. 들길을 걷는 행복한 발걸음들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 언제 였던가 그냥 살아지는 세월이 있었던 것 같다. 눈부신 햇살에 눈부셔 하면서도, 달 빛이 마냥 그윽하게 머물러 주었는데도 그저 땅만 주시하며 걸었던 시간이 있었다. 연유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에야 깨닫게 된 적이 있었다. 숨을 쉰다고 끼니를 그르지 않는다고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음을. 천지에 소중한 것도 보이지 않았고, 감사도 없었고 공허함 속을 왕래하며 헛걸음질을 해왔던 것을. 그렇듯 공허한 시간의 홍역을 치르고는 사소함에까지 눈독을 들이 듯 관찰하는 습벽에 빠져들게 되었다. 세견하고, 내관하며 정감까지 반복하면서 몸에 익어버린 습성이 습관처럼 조감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마치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처럼 넓은 지경 전체를 한눈에 관찰하듯, 본의 아니게 배어버린 상투적인 생리를 세상을 향한 기척으로 삼으며 반응 감지를 위해 제딴은 민첩하게 마음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비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향방 없이 나부대는 날을 바람이 부는 대로, 햇살 내려 쬐는 날도 하늘이 잔뜩 찌푸린 음산한 날도, 눈 여겨 보면 밝기도 색상도 느낌도 다 각양각색이다. 혹여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라도 눈에 띠이면 잽싸게 사진으로 담아두고, 가슴을 두근대게 하는 단어 하나가 떠오르면 메모를 해두어야 소중한 무엇 인가를 놓치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소중한 교훈을 얻기도 한다. 장난끼 어린 바람에도 내색 없이 흔들어대는 나무도, 우주의 한 귀퉁이지만 우리에게 보여 지는 하늘도 모두가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하늘을 운행하는 별들도, 달빛도 순간을 놓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듯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상실의 아픔도 헤어짐의 나락까지도 이 모두가 감사이고, 소중한 축복이라고 쉼 없이 일러 주었다. 고통 마저도 무르익음으로 여물어 가는 과정임을. 순간순간 세상을 향한 눈높이가 세상을 향한 귀가 더 넓게 깊게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면서 이 모두가 한 편의 시로 발현되고 있었다.
세상이 추구하고 자랑 삼는 부와 권력이 충만한 계층에서는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싹 트지 않음까지도. 권력자에게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세상이 이리도 소란 스럽지는 않았을 터인데. 주체 못할 만큼 부가 넘치는 사람에게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가난한 사람들이 이토록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하찮게 여김을 당하지는 않았 을 것을. 외모만으로 외면당하는 우스꽝스러운 인생 연출은 더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부와 권력이 난무하는 곳에서는 시인이 태어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 잣대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쓸모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사랑을 이야기하고, 대책 없는 길을 아름답다고 떠날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은 귀하고 존경받을 심성을 지녔다. 지치지 않는 따스함이 계속 샘 솟듯 한다.
외롭고 곧게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지없이 아름다울 뿐이다. 큰 권력을 잡고 있어도 셀 수 없는 부를 지녔을지라도 산다는 것은 두 발을 땅에 두고 누군가를 위해 길을 열어주고 동행하는 그림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홀로 독주하는 삶이 아닌 함께하며 서로의 가슴을 따스한 인간애로 묶어가는 것이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시인들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함께 있어도 넘치지 않는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고여 있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위해 온기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굳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아도 얼어붙은 세상을 따스한 훈기로 감싸고 포옹해 주려 한다. 온기는 겉모습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두께가 실천의 비롯이기 때문이다.
어느 새 별들이 깊은 밤과 별리 되는 남빛 새벽이 찾아 들었다. 새벽이 밝아오면 다시 저녁이 오고 무상한 사색을 남겨온 일기장을 다시 펼칠 것이다. 실천 의지에 따라 선택한 목표를 향한 긴장의 고지는 대상 없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것만큼 소중한 기적은 없는 듯 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숲이 지닌 색상처럼 초록 천지가 아닌 날마다 독자적인 색상을 추구하는 날들이 모여 세월을 만들어 간다. 평안이 있으면 고통이, 기쁨이 있으면 서글픔이 제 맘대로 찾아 드는 못 말리는 조합이 이어지는 것이 세상살이다. 대낮에 멀쩡하게 떠 있는 낮달처럼, 초저녁에 불쑥 솟아오르는 보름달처럼, 그렇게 살기로 하자고 마음을 앉힌다. 밤을 밝힌 소야곡의 뒤척임을 접어야 할 것 같다. 하루들 속에 끼어드는 예기치 않은 사념들로 당황해 하는 것이 어디 나 뿐일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