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신용 강등 쇼크
피치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전격 강등한 것은 미국의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규모가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데 대한 경고로 해석된다. 적자는 늘어나지만 이를 적기에 처리해야 할 의회와 행정부는 협상마다 벼랑 끝에 서고, 결국 전 세계가 10년에 한 번꼴로 미국의 파산 가능성을 숨죽여 지켜봐야 하는 시스템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과연 미국의 부채 관리 시스템과 거버넌스가 최고 등급의 신용에 걸맞느냐는 문제 제기인 셈이다.
1일 미 재무부에 따르면 2023년 회계연도가 시작된 지난해 10월 이후 6월 말까지 8개월간 미국의 재정적자는 1조3,936억달러를 기록했다. 의회예산국이 올 2월 전망한 올해 전체 적자 규모 1조3,940억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지난해 같은 기간(5,150억달러)보다는 170%나 늘어난 규모다.
세입이 부족하니 채권 발행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난달 31일 미국 재무부는 악화되는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7월부터 9월까지 발행하는 국채 물량 추정치를 기존 7,330억달러에서 1조20억달러로 늘렸다. JP모건의 제이 배리 미 국채 전략 부문 수석은 “재정 상황과 연방준비제도(FRB·연준)의 대차대조표 축소, 재무부의 보유 현금량을 고려하면 채권 발행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며 “현 추세를 고려하면 올해 연방정부의 적자 규모는 1조 8,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는 천문학적 수준으로 불어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정치권의 위기 관리 능력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피치는 “6월 부채 한도 문제는 2,025년 1월까지 유예하자는 초당적 합의가 있었지만 지난 20년간 재정과 부채 문제를 포함해 미국의 거버넌스는 악화돼왔다”며 “막판 몰아치기식 해결이나 벼랑 끝 대치는 재정 관리에 대한 신뢰를 해쳤다”고 꼬집었다. 이어 “앞으로 3년간 미국의 재정은 감소할 것이고 부채는 늘어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장은 이번 신용등급 강등 여파가 금융시장에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촉각을 세우고 있다. 통상 신용등급이 하락하면 해당 주체가 발행한 채권은 위험 프리미엄이 커지면서 수익률이 상승(가격 하락)한다. 다만 전 세계의 수요가 받쳐주는 미국 국채의 특성상 갑작스런 미 국채 매도세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펜달그룹의 자금매니저인 에이미 시에 패트릭은 “이번 신용등급 하락 여파는 올 상반기 미국 부채한도 이슈와 비슷할 것”이라며 “단기적 우려는 있겠지만 안전성이나 유동성 측면에서 미국 국채의 대안을 찾기는 어렵기 때문에 (채권시장에) 부정적 영향은 최소한으로 제한될 것”이라고 봤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글로벌레이팅스가 부채한도 위기로 미국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렸던 2011년 8월 당시 10년 만기 미국 국채 수익률은 오히려 강등 하루 만에 24bp(1bp=0.01%포인트) 하락했다. 당시 투자자들이 위험자산을 매도하고 안전자산을 찾으면서 오히려 미국 국채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험에 비춰 시장에서는 미국 국채보다는 위험자산이나 일부 회사채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이 나온다. 싱가포르 DBS뱅크의 전략가인 장웨이량은 “미국 기업의 신용등급이 후속 강등될 우려가 있고, 이는 역설적으로 안전자산인 국채 수요를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피치가 금융시장보다 미국 정치권에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컬럼비아스레드니들의 선임분석가인 에드워드 알후세이니는 “피치는 앞으로의 부채 증가, 또 부채한도 협상 방식에 대해 경종을 울리려 한 것 같다”며 “모두 정책에 대한 것보다 정치적인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익명을 요구한 조 바이든 행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강등을 앞두고 정부를 대상으로 실시한 브리핑에서 피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0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이듬해 1월 6일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회에서 폭동을 일으킨 사건을 거듭 우려했다”고 전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피치의 조치를 비판하고 나섰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피치의 신용등급 강등은) 자의적이고도 오래된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라고 의미를 일축했다.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도 피치의 결정에 대해 “뜬금없고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뉴욕=김흥록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