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럽조사 결과 38% 달해…지난 22년래 최고 수치
LA 한인타운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주부 이모씨는 코로나19 팬데믹 때 직장을 잃고 남편의 수입에 의존해 두 아이를 돌보고 있다. 이씨는 인플레이션에 지난해부터 자꾸 줄어가는 은행 잔고를 보면 마음이 심란하다고 했다. 여유가 없다 보니 정기적으로 피부과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의료비가 가계에 부담이 되다 보니 정기 검진을 몇 차례 연기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지난해 작은 아이가 고열로 경련을 일으켜 입원해 8,000달러를 병원비로 썼다”며 “의료비는 오르는데 은행 잔고는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정말 큰 일”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 침체의 우려 속에 인플레이션이 이어지면서 몸이 아파도 진료와 치료를 건너뛰거나 병원을 찾지 않는 한인과 미국인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각종 생활 물가가 크게 오른 상황에서 치솟는 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보다 4배 가까이 의료비를 더 지출하면서도 각종 보건 지표에서 최악의 기록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고물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미국인들이 높은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진료나 병원 방문을 기피하는 현상이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조사기관인 갤럽이 지난해 11월부터 12월까지 벌인 조사 결과 응답자의 38%가 진료비나 치료비에 부담을 느껴 병원을 제때 방문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 2021년 조사 결과에 비해 12%포인트가 증가한 수치이고, 지난 22년간 실시한 조사 중 가장 높은 수준에 해당한다는 게 갤럽의 설명이다.
이번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소득이 4만 달러 미만인 저소득층 가구의 경우 병원 진료를 기피하는 것이 연소득 1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에 비해 2배 가량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플레이션 여파로 병원 진료나 약값 등 관련 비용이 예년에 비해 올라 부담으로 작용한 탓이다. 지난 1월 기준으로 병원비는 전년 대비 0.5% 올랐고 처방약 값은 2.1%나 상승했다. 병원 진료비와 약값의 상승세는 올해는 물론 내년까지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다.
건강보험이 있더라도 치솟는 의료비에 속수무책이다. 비영리재단인 커먼웰스펀드에 따르면 직장 건강보험이 있는 직장인 중 29%가 제대로 보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기부담금이 너무 높은 탓에 병원 진료는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높은 의료비는 곧 의료비 부채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방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에 따르면 의료비를 갚지 못해 채권회수업체로 넘어 가는 비율이 전체 부채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민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주민의 20%가 최소 5,000달러의 의료비 부채를 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절반 정도는 의료비 부담 때문에 진료를 기피해 증상이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악화됐다고 답했다.
이럼에도 미국은 전 세계에서 의료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고 있는 나라다. 커먼웰스펀드에 따르면 미국은 국민 1인당 의료비 지출이 연 1만687달러인데 반해 한국은 2,874달러로 무려 4배 가까이 차이가 나고 있다. 의료비 지출이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기대 수명은 77세를 겨우 넘어 선진국 중 바닥권에 머물러 있다.
연방준비제도(Fed)가 지난해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 미국인의 비상금 수준이 평균 400달러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비 인상이 내년까지 이어진다면 미국인들의 병원 진료 기피 현상은 지속될 것이라고 신문은 덧붙였다.
<남상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