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전쟁
그리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다녔던 유치원이 마냥 좋았다. 매월 한 번 치르는 생일잔치 덕분이었다. 온갖 과자며 사탕도 좋았지만 바나나가 최고였다. 1980년대 초 바나나는 고급 수입 과일이었다. 종합병원 앞 과일 가게 같은 데서나 주로 팔았고 평소에는 먹기가 쉽지 않았다. 기록을 찾아보니 개당 1,000원, 당시 도시 노동자의 월평균 소득이 40만 원 수준이었다.
그런 바나나를 원생 한 명에게 3분의 1개씩 주었으니 유치원이 최고였다. 내 생일이 아닐지라도 잔칫날이면 마냥 신나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 요즘 바나나의 입지는 다르다. 1991년 수입 제한 품목에서 풀리면서 바나나는 온 국민이 즐기는 과일이 됐다. 2016년을 기점으로 가격이 20~30%가량 올랐지만 여전히 싸다. 부드러운 단맛과 포만감을 주므로 자기만의 입지를 확실히 누린다.
입지가 이렇게 바뀌기까지 바나나를 둘러싼 전쟁이 있었다. 그렇다,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가까운 전쟁이다. 세계 대전은 다행스럽게도 2차가 마지막이었지만 ‘바나나 전쟁’은 3차까지 벌어졌고 현재진행형이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바나나의 입지가 다시 바뀔 수도 있다. 아예 못 먹거나 귀해지지는 않겠지만 지갑을 열기 전 망설일 수준까지는 가격이 오를 수 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즐기고 있는 과일, 바나나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바나나 공화국의 탄생과 1차 바나나 전쟁
1870년, 미국의 사업가이자 선주인 로렌조 다우 베이커는 시쳇말로 대박을 쳤다. 범선 텔레그래프호로 자메이카에서 싣고 온 바나나를 보스턴에서 팔아 1,000%의 이익을 남겼다. 이국의 맛을 지닌 데다가 가격도 국내 생산 과일보다 쌌던지라 바나나는 큰 인기를 끌었다. 1913년 기준 25센트(2021년 기준 6.85달러, 약 8,700원)로 사과는 고작 2개 살 수 있었던 반면, 바나나는 12개를 살 수 있었다. 맛있고 싼 과일이라니 인기를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의 서막이 열렸다. 이미 산업화된 농업 역량을 갖춘 미국 사업가들이 중남미에 직접 진출해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1873년, 미국 철도 사업가인 헨리 마이그스와 조카 마이너 C. 키스는 코스타리카에 건설하는 철로 주변에 대규모 바나나 농장을 설립했다. 원래는 철도 노동자들의 먹을거리용이었지만 곧 바나나의 치솟는 인기를 깨닫고 미국 남동부로 수출을 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 중반 키스가 설립한 ‘열대 무역 및 운송 상사’는 곧 합병을 거쳐 유나이티드 프루트 상사(United Fruit Company·UFC)가 되어 중남미의 바나나 사업을 독점하게 된다.
이런 기업들의 사업 독점은 단순한 대규모 농장 조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활한 수송을 위한 도로며 철도, 항만까지 건설해 생산부터 유통, 판매까지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일종의 수직계열화를 이룬 것이다. 가장 먼저 미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한 나라는 온두라스였다. 당시 온두라스는 수도인 테구시갈파마저 철도가 깔리지 않았을 정도로 개발이 덜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농장 주변은 이야기가 달랐으니, 미국 기업들은 온두라스 정부로부터 증여를 받은 대지에 철로를 깔아 본격적으로 바나나를 수출했다.
그렇게 미국의 자본이 저개발 국가에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바나나 공화국은 미국의 소설가 O. 헨리가 처음 고안해 낸 용어이다. ‘마지막 잎새’로 잘 알려진 그는 은행원이었다.
횡령 혐의로 지명수배에 처해지자 온두라스로 피신해 1897년 1월까지 테구시갈파에서 반 년 정도를 숨어 살았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양배추와 왕들(1904)’을 썼는데, 가상의 국가 안추리아를 등장시켜 온두라스의 현실을 고발한다. 바나나 공화국이란 바나나를 구실로 침투한 미국의 자본이 사회 전반에 개입해 부패한 국가를 의미한다.
미국의 개입은 기업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착취 당하는 생산국 국민들은 현실을 좌시하지 않았다. 노조 결성을 통해 환경 개선을 도모하는 한편, 혁명 등을 통해 친기업적인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시도 또한 이루어졌다. 미국은 이런 움직에 민병대는 물론 해병대를 필두로 한 정규군까지 투입해 노동 운동을 탄압했다. 또한 친노동자 성향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기업 친화적인 인물을 정권에 앉히는 등의 개입마저 일삼았다. 본격적인 바나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1898년부터 온두라스를 필두로 파나마, 니카라과, 멕시코, 아이티, 쿠바 등 중남미와 카리브해 일대에서 바나나 전쟁이 벌어졌다. 바나나뿐만 아니라 사탕수수, 담배 등의 작물 및 파나마 운하 주변의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미치려는 미국의 심산이었다. 바나나 전쟁은 1934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린외교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가장 먼저 바나나를 독점했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상사가 오늘날의 치키타 브랜드 인터내셔널(Chiquita Brands International)이다. 그 밖의 회사들도 우리에게 익숙한 돌(Dole) 등의 다국적 기업으로 변모해 오늘날까지 영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바나나 농장의 노동 조건은 확실히 개선되었다고 하기 어려운 상황인 가운데, 지나친 농약 사용 등의 문제 또한 지적되고 있다.
■2차 바나나 전쟁: 미국과 EU의 무역 분쟁
2차 바나나 전쟁은 무역 분쟁이다. 1975년 2월, 당시 유럽공동체(EC)는 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제국연합(ACP)과 로메(Lome) 조약을 맺는다. 옛 유럽 식민지 46개국의 무역 특혜를 보장하는 내용이었고 바나나의 무관세 수입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월이 흘러 1992년, 유럽연합(EU)은 수입되는 바나나의 일부에 관세를 매기기로 결정한다. 당시 유럽은 매년 25억 톤 이상의 바나나를 소비하는 가운데 75% 이상이 라틴아메리카산이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엄청난 물량의 바나나를 수출하지만 ACP 소속 국가가 아니므로 관세를 부담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산업을 독점한 미국발 다국적기업에 부담으로 돌아갔다.
결국 1993년, 콜롬비아와 과테말라 등 남미 5개국이 다국적기업을 등에 업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본격적인 분쟁의 막이 올랐다.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 기업이었던 치키타가 당시 여당이었던 클린턴의 민주당에 5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기부할 정도였다. 1999년 3월, 미국은 영국산 린넨, 프랑스산 치즈, 덴마크산 햄 등 유럽산 14개 품목에 100%의 보복 관세를 부과했다.
세계무역기구는 1999년 4월 7일, EU의 특혜와 미국의 보복 관세를 동시에 철회하라고 결정했지만 분쟁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유럽은 수입량 할당 등 비관세 정책을 통해 ACP를 우회적으로 도왔고 미국은 보복 조치로 응수했다. 유럽이 환경 보호를 명목으로 미국 노후 항공기의 영공 통과를 금지하자 미국도 유럽의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의 미국 내 취항을 금지시켰다. 이에 맞서 유럽은 미국산 호르몬 쇠고기 수입 금지를 명령했다. 이처럼 다소 치졸해 보이는 보복 조치들로 점철된 2차 바나나 전쟁은 2009년 말, 16년 만에 막을 내렸다. 유럽연합이 라틴아메리카산 바나나에 매겨진 관세 인하에 합의했고, 2012년 11월 양측이 각기 WTO에 제소한 8건의 분쟁을 일괄 타결하면서 완전히 매듭지어졌다. 세계 2차대전 이후 최대 규모에 최장기 무역 전쟁이었다.
■3차 바나나 전쟁: 바나나의 생존 투쟁
3차 바나나 전쟁은 바나나와 인류가 병충해와 벌이는 생존 투쟁이다. 여느 농작물처럼 바나나도 병충해에 취약하다. 최악의 숙적은 파나마병이다. 1890년대에 페루의 파나마에서 처음 발견돼 이름이 붙은 파나마병은 포자가 바나나 나무의 뿌리부터 잠식하기 시작하는 곰팡이다. 파나마병에 감염된 바나나 나무는 수분 및 영양 공급이 차단돼 결국 말라죽게 된다.
1960년대를 거치며 세계의 바나나는 큰 변화를 겪었다. 경작 및 유통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로스 미셸(Gros Michel) 품종이 파나마병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점차 캐번디시(Cavendish)로 대체됐다. 파나마병에 견디는 가운데 과실의 맛이 가장 좋아 선택된 캐번디시는 오늘날 바나나 품종의 유일무이한 대세이다.
단일 품종의 우세란 종 다양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캐번디시에 치명적인 병충해가 출현할 경우 바나나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1993년 처음 발견된 TR4(파나마병의 한 변이)에 캐번디시가 취약함이 밝혀졌다. 전 세계의 바나나씨가 마를 위험은 아직 없다고들 하지만 자칫 잘못할 경우 예전만큼의 대중성은 위협받을 수 있다.
이런 바나나의 보호를 위해 생식질(유전자와 비슷한 개념)의 보전이나 야생 바나나의 씨 및 서식지 보존 등의 시도가 벨기에의 루뱅 가톨릭대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