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덟 군데의 경치를 묶어 팔경이라 자랑한다. 중국 후난성 소상(瀟湘) 팔경에서 유래한 이름 붙이기이다. 당진은 하나를 더해 9경이라 자랑한다. 왜목마을, 서해대교, 솔뫼성지 등이 포함된다. 당진 면천면 사무소 로비에는‘면천팔경’을 알리는 홍보물이 요란스럽게 전시돼 있다. 안개 낀 영탑사의 그윽한 새벽 종소리(영탑효종), 옛 성터인 몽산의 황홀한 저녁 노을(몽산석휘), 아미산에 솟은 차가운 가을 달(아미추월) 등 지역의 명소에 그윽한 감성을 담았다. 이어서 면천의 특산물과 문화재, 고을을 빛낸 인물까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상위 행정 단위인 당진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 오랜 세월 지역 중심, 당진에 가려진 면천의 진면목
면천은 조선 태종13년(1413) 군으로 승격하고부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기 전까지 지역의 중심 고을이었다. 당진뿐만 아니라 인근 홍주(홍성)까지 합쳐서 22개 면을 관할했다. 당진 역시 면천군에 소속된 현이었다. 이를테면 면 사무소의 전시물은 600년 고을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작은 몸부림이다.
면천면의 첫인상은 한적함과 어수선함이다. 아담한 읍성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가운데 곳곳에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읍성 안에는 한옥보다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 건물이 주를 이루고, 더러는 빈집으로 속절없이 낡아가고 있다. 무질서하게 자리 잡은 일부 현대식 건물이 성벽 담장 위로 불쑥 솟아오른 모습도 눈에 거슬린다. 그럼에도 마을을 돌아보면 곳곳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면천읍성의 흔적이 보물처럼 남아 있다.
읍성은 전체 둘레가 약 1,200m로 크지 않은 편이다. 높이는 3.6~6.8m, 네모꼴에 가까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옛 정취를 간직한 석축은 해방 후 인근 원동 저수지 축조에 사용하기 위해 허물어 제 모습을 잃었는데, 현재 남쪽과 서쪽 성벽을 복원한 상태다.
나머지 구간은 시간을 두고 옛 모습으로 되돌리는 중이다. 동쪽 성벽 일부에는 군·현별 책임 구간과 축조 시기 등을 기록한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일부 남아 있다. 세종실록에는 면천읍성 축성에 50여 개 군의 장정이 동원됐다고 기록돼 있다. 성이 완성된 것도 이무렵이다.
읍성의 중심에는 풍락루(豊樂樓)라는 2층 누각이 외로이 서 있다. 면천 관아의 정문으로 백성이 풍족하고 기쁨을 누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누각 뒤편에는 객사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객사 건물은 1911년부터 면천초등학교 교사로 사용해 오다가 1972년 학교를 확장하면서 허물고 말았다.
그렇다고 객사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학교 터 모퉁이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성상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키 20m에 가슴높이 둘레가 6.2m에 달하는 거목이다. 원줄기의 속이 깊게 파였지만 의연히 푸르름을 자랑한다. 두 나무는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과 딸 영랑과 관련한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노후에 고향인 면천으로 돌아온 복지겸이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딸 영랑은 날마다 기도하고 병구완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나 ‘뜰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고, 진달래 꽃잎을 따서 안샘 물로 술을 담가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더니 부친의 병이 거짓말처럼 나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진부한 스토리이지만 이를 근거로 하면 은행나무의 나이는 1,100년에 가깝다. 바로 인근에 딸의 애틋한 효성을 기리는 영랑공원이 있고, 샘터 앞에는 역대 군수가 풍류를 즐기던 군자정이 세워져 있다. 이때 유래한 두견주는 면천을 대표하는 전통주가 됐다.
군자정 앞에는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비’가 위풍당당하게 세워져 있다.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이던 원용은(1902~1951)은 1919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3·1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3월 10일 전교생이 참여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나이 17세였다. 대규모 학생 의거로 알려진 광주학생독립운동보다 10년이 앞선다. 옛 초등학교 앞에는 원용은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박창신, 이종원을 기념하는 비석이 별도로 세워져 있다.
복지겸과 함께 면천을 대표하는 인물로 연암 박지원이 꼽힌다. 영랑공원에서 대나무 숲길을 통과해 성 밖으로 나가면 자그마한 저수지가 나타나고, 한가운데에 초가 정자가 세워져 있다. 골정지와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다. 1897년 면천군수로 부임한 연암이 기존의 저수지를 준설하고 정자를 지은 다음 유생들에게 강의했던 곳이다. 저수지 바로 위에 면천향교가 있다. 저수지 준설은 결과적으로 다목적 포석이었다. 한 고을의 살림을 책임진 지방관리로서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게 최우선 목적이었지만, 유생들에게 쾌적한 학습 환경을 마련해주고, 멀게는 주변 경관까지 내다본 혜안이었다.
■ 일상이 녹아 있어 더 풍성한 면천읍성
면천읍성의 매력은 주민과 동떨어진 관광지가 아니라 일상과 공존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읍성 안에는 ‘금성전파사’라는 낡은 간판을 단 모터수리점이 있고, 56년 역사를 자랑하는 콩국수 식당 ‘김가면옥’과 그만큼 오래된 이발관도 있다. 그렇다고 마을이 속절없이 곰삭아 가는 것만은 아니다. 낡은 건물에 현대적 감성을 입힌 미술관, 책방, 소품가게, 카페가 구석구석 둥지를 틀고 있다.
마을에 조용한 변화를 몰고 온 건 ‘면천읍성안그미술관’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김회영 관장이 우체국이 성 밖으로 이주한 후 남겨진 옛 건물을 인수해 2017년 개관한 미술관이다. 골격을 그대로 남기고 하얀 페인트로 단장한 건물 외벽에는 미술관 간판과 함께 ‘면천우체국’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은근히 60년 된 건물의 역사를 알려주는 장치다. 사무실이었던 1층은 갤러리로, 교환실이었던 2층은 카페로 꾸몄다. 카페에서 뒷문으로 나가면 옥상정원이다. 집배실로 쓰던 건물 옥상에는 조그마한 배 한 척이 올라 앉았다. 작품명은 ‘삐딱선’이다.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
미술관 옆은 작은 정원으로 꾸몄다. 높지 않게 키운 정원수 그늘 아래에 원색으로 단장한 책상과 의자가 놓였고, 각종 광물 표본을 정원석으로 배치했다. 성 밖으로 이전한 면천초등학교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무심히 사라질 물건이 미술관으로 이전해 새로운 가치를 입었다.
간판에 ‘면천읍성’을 넣은 덕에 미술관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단기간에 마을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미술관은 아이들을 위한 ‘토요문화학교’와 어른들을 위한 ‘그림교실’을 운영하며 주민들과 교감한다. 김회영 관장은 “난 못 혀, 그런 거 평생 안 해 봤어”라며 손사래 치던 어르신들이 불과 1~2주 만에 일상을 화폭에 옮기고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놀랐다고 회고했다. 개중에는 여건이 갖춰졌다면 훌륭한 화가가 됐겠다 싶은 어르신도 있다고 했다. 그림교실에 참가한 주민들의 작품은 ‘오래된 그림책’으로 편집됐고, 마을 공터를 장식하는 벽화로도 남았다.
미술관 건물보다 앞선 약 100년 전 면천에 처음으로 세워진 우체국 건물은 ‘미인상회’ 카페로 단장했다. 쌀로 만든 디저트를 취급하기 때문에 ‘쌀 미(米)’ 자 미인상회다. 넓지 않은 실내는 현대적 감성으로 꾸몄음에도 사랑방 역할을 하는 옛날 다방처럼 푸근하다.
<당진=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