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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중… 호수에 비친 내면

지역뉴스 | 라이프·푸드 | 2019-03-08 11: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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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지기 고향 친구들 부부 동반 모임

휴대폰 공개로 드러나는 비밀·욕망 그려

남자 주인공들의 소년 시절 촬영 장소로

바다·민물 섞인 8㎞ 호수에 산책로 조성

수면에 비치는 은빛 억새·하얀 자작나무

범바위·관음암 기암괴석은 한폭 수채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남편의 일상은 아내가 돌연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와르르 무너진다. 이상한 꿈을 꾼 그 날 이후 아내는 고기와 장어가 가득했던 냉장고를 비워버리고 무슨 영문인지 남편과의 잠자리도 거부한다. 나날이 쇠약해지는 아내에게 고기 한 점 먹이려고 처가 식구들까지 불러모은 날에는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까지 서슴지 않는다. 아내의 평범함이 마음에 쏙 들어 결혼했던 남편은 뒤늦게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며 절망한다.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영화 ‘완벽한 타인(2018년)’도 ‘채식주의자’처럼 가닿을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영화에서 40년 지기 고향 친구들과 그들의 배우자는 오랜만에 만난 저녁 모임에서 식사 도중 휴대폰으로 날아드는 모든 전화·문자·e메일을 공개하는 게임을 시작한다. 이야기의 특성상 대부분은 실내에서 극이 진행되는데 주인공들의 소년 시절을 묘사한 첫 장면은 강원도 속초의 영랑호에서 촬영됐다.

둘레 8㎞의 자연 호수인 영랑호의 이름은 그 유래가 ‘삼국유사’에 전해온다. 신라시대 화랑인 영랑(永郞)은 무술대회장이 있는 금성(지금의 경주)으로 가는 도중에 이 호수에 이르렀는데 빼어난 경관에 넋이 홀려 대회에 출전하려던 계획조차 잊고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미화되고 부풀려지기 마련인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가면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영랑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수려한 경치를 보여준다. 산책로에 들어서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눈길을 끌고 물 위를 여유롭게 노니는 철새와 오리도 보인다. 시리도록 맑고 잔잔한 호수는 푸른 소나무와 하얀 자작나무의 아름다운 자태를 데칼코마니처럼 수면에 찍어낸다. ‘속초 8경’ 중 하나인 범바위와 관음암 등의 기암괴석은 ‘용(龍) 그림을 완성하는 눈동자’처럼 압도적인 풍경에 단단한 마침표를 찍는다. 호수 주변에는 영랑호를 내려다보며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리조트들도 자리한다. ‘완벽한 타인’에서 어린 시절의 주인공들은 영랑호가 바다인지 호수인지를 놓고 다투는데 실제로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호숫가를 거닐다 보면 인간의 이중성과 어두운 욕망을 그린 영화의 문을 여는 장소로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시간이 넉넉하면 영랑호에서 동쪽 끝 바다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한 장사항도 둘러볼 만하다. 소형 어선들이 드나드는 포구인 이곳은 해마다 여름이면 ‘오징어 맨손잡기 축제’가 열리는 등 어촌 체험마을로 유명하다.

‘채식주의자’의 남편처럼 ‘완벽한 타인’에서 수현(염정아)은 남편의 숨겨진 비밀을 알고 “서로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낯선 사람이었네…”라고 울먹인다. 재미로 시작한 게임은 이렇게 수습 불능의 사태로 치닫고, 등장인물들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폭주한다. 가장 강력한 사랑의 끈으로 묶인 부부조차 무지와 불신의 늪을 허우적대는 관계로 묘사한 이 영화의 냉소적인 세계관은 어쩔 수 없이 관객을 복잡한 상념에 빠트린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는 ‘완벽한 타인’들뿐인 것일까. 오랜 세월 헤맨 끝에 마침내 ‘반쪽’을 찾았는데 왜 ‘나의 당신’은 알다가도 모르겠고, 닿을 듯 말듯 붙잡히지 않는 것일까.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이 새어나오는 찰나, 석호(조진웅)가 수화기 너머로 딸에게 건네는 조언은 축 처진 우리의 어깨를 위로하듯 다독이고 한 번뿐인 인생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용기를 북돋운다. 입대를 앞둔 남자친구와 지방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딸을 향해 아빠는 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사려 깊은 말투로 속 깊은 진심을 전한다. 이 별것 아닌 얘기가 딸은 물론 영화를 보는 우리의 마음도 함께 어루만진다. 그래, 맞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무수한 물음표를 기쁨의 느낌표로 바로 세우는 정답은 뜻밖에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든 가족이든 ‘너를 다 안다’는 착각은 내려놓기. 상대의 공간을 인정하되 상대의 아픔에는 철저히 공감하기. 사는 게 고달파 지쳐 쓰러질 때는 얼른 다가가 힘껏 일으켜 세우기. ‘완벽한 타인’과 더불어 사는 우리가 늘 가슴에 품고 숙지해야 할 수칙들이다. 

<글·사진(속초)=나윤석기자>

인간의 이중… 호수에 비친 내면
인간의 이중… 호수에 비친 내면

‘영랑호’의 맑고 투명한 수면 위로 푸른 소나무와 하얀 자작나무가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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