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자(시인 수필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내다 보면 사람에게 다가간다는 일이 실로 조심스럽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 또한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뜻과 같은데 누군가를 잘 이해한다 한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겪은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음이다. 한 동안 불행한 일이나 슬픔에 잠긴 사람을 위로하려 들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아픔은 그 자신 스스로 치유하도록 놔두는 것이 차원 높은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냉정한 사람으로 치부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해하는 척하면서 자기 위안으로 돌리게 되는 호기심 같은 위로는 오히려 아픈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알 것 같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사람을 향한 나의 기대와 감정을 믿는 것이다. 타인을 완전히 안다고 확신하는 순간 오히려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갇혀 상대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성찰을 깨닫게 된다. 공존의 질서에서 발생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점은 ‘유한한 자원에 둘러싸인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충돌’ 이다. 생태계, 사회, 경제 문제. 어느 영역 이든 여러 존재가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협력해야 하지만 개별 주체의 생존 본능은 개인의 이익과 전체 지속 가능성이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같은 연령대 노년들 과의 대화는 쌓인 한을 풀어놓거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가 들릴 것 같은 노년들의 풀 죽은 이야기가 어찌 젊음들의 풋풋한 이야기 만큼 싱싱한 매력이 있을까 만, 겪어보지 못한 나이를 짚어가면서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면서 마음이 숙연해 지기도 하고, 때론 분변 없는 생각이 빚은 누추함과 예상치 못한 게으름을 끌어들이는 내 마음을 끌어 안으며 뉘우침 번복을 연출 하기도 한다. 크고 작은 일은 남녀노소 분별없이 수시로 발생하는 일인 데도 단순한 반응이 아닌 지난 날 겪었던 모든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는 책무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일상 중에 유사한 상황에 임하게 되면, 가정 먼저 하는 일은 우리집 할배와 함께 실마리를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효과에 매번 실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공존의 질서를 지켜내려는 욕구가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지론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에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마음 행방을 잃을 수도 있다는 염려는 하지 않기로 했다. 복잡하게 얽혀 버린 공존 질서를 극복하고 나면 더 유연하고 당당한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이나 고통에 빠진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적인 유대요 ‘공존의 질서’가 아닐까 한다.
공존의 질서에 대처할 수 있는 노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뿌듯함이 삶의 활력을 더해 줄 것이다. 세상살이에서 공존의 유익을 위해 규칙을 지키고 환경을 보호하며 양보하는 주체가 있는가 하면, 질서를 어겨가면서까지 개인 이익만 챙기는 경우도 존재하고 있다. 양보하면 손해보는 구조는 다양성의 가치관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공존 질서가 유지되려면 이기심을 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제도적 규칙과 시민 의식의 이타성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균형 잡힌 세상을 기대해 보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아닐까 한다. 국제 정치, 경제, 사회갈등 분야에서의 공존문제는 인류 곁을 떠날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힘든 고통을 이겨낸 자는 남의 고통이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리는 사람으로 훈련된다. 어느 시대에도 위기는 있는 법, 위기 대처는 나눌 수 있어야 삶이 가벼워진다. 유연성과 포용력, 소통과 협력으로 변화되는 세상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램 하면서, 중간 선거를 치른 이 땅에 공존의 질서와 민주주의의 당위성이 적용되기를 기원 드린다. 공존의 지혜가, 공존의 가치와 균형이, 공존의 윤리가 편만 한 세상이기를 간곡히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