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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건너온 음악, 삶을 보듬다

지역뉴스 | | 2026-08-13 19:15:48

김건흡,건너온 음악, 삶을 보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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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수필가·칼럼니스트)

 

황혼의 길목에서 가만히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인생의 중요한 모퉁이마다 이름 없는 선율들이 나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악보 위에 새겨진 까만 음표들이 어떤 소리를 가리키는지, 도레미의 깐깐한 규칙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소리의 높낮이를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솔직한 음치로 한평생을 살아왔으니까요. 하지만 음악을 이론으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나 봅니다. 악보를 읽지 못해도, 그 소리가 마음의 가장 깊은 여울에 와닿는 다정하고 온화한 감촉만큼은 누구보다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고요하고도 아련한 인연의 시작은 까마득한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아쉽고 결핍되어 있던 그 가난했던 젊은 날, 청춘이라는 단어의 무게조차 묵직한 짐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풋풋한 열정 뒤로 막연한 불안과 쓸쓸함이 교차하던 교정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자주 헤매던 무렵, 내 삶에 고전음악이라는 낯설고도 커다란 빛이 찾아왔습니다. 당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두운 골목 안의 '고전음악 감상실'을 기웃거리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자 작은 낭만이던 때였습니다.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LP판이 빼곡히 꽂혀 있고, 담배 연기와 짙은 커피 향이 묘하게 섞여 들던 그 묵직한 공간. 주머니는 얇았지만 청춘의 허기를 달래려 들어섰던 감상실의 어스름한 조명 아래서, 나는 처음으로 고전음악의 나지막하고 깊은 숨결을 만났습니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발걸음이었지만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선율은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결핍으로 허덕이던 청춘의 가슴속에 들어온 그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막막한 현실을 넘어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해주는 구원이었고, 답답했던 삶에 새로운 지평을 번쩍 열어준 기적이었습니다. 언어와 수식어를 뛰어넘는 그 깊은 울림은 지친 마음의 가장 여린 곳을 가만히 터치해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 고전음악은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내 곁을 지키는 소리 없는 영혼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세월은 참으로 부지런히 흘러 어느덧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거울 속에 깊게 새겨진 주름만큼이나 수많은 계절이 지나갔고, 세상은 눈이 뒤집힐 만큼 빠르고 낯설게 변했습니다. 빛바랜 수필집 대신 작고 차가운 화면으로 세상을 보는 날이 많아진 요즘이지만, 그 익숙하지 않은 디지털 공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청춘의 날에 만났던 옛 친구의 목소리를 찾곤 합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는 저녁이면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유튜브라는 현대의 감상실에서 고전음악을 재생합니다.

얼마 전 화면 너머로 흘러나왔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주인공 슈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목숨을 걸고 연주한 쇼팽의 녹턴 또한 그렇게 다가온 선율이었습니다. 영화의 전모를 완벽히 알지는 못하지만, 작은 화면 너머로 울려 퍼지던 애잔하면서도 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피아노 선율만큼은 가슴속 깊은 우물에 돌이 던져진 것처럼 깊은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얼어붙은 잿빛 폐허 한가운데서 피어오르던 그 소리는, 절망의 어두운 끝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포근하고 숭고한 온기였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세월의 두께가 더해지면서, 젊은 날엔 그저 스쳐 지나쳤던 우리네 가요들도 하나둘 가슴 깊숙이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예술의 경지를 자랑하는 고전음악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나지막한 노래 또한 내 지친 마음을 다정하게 건드려주는 것입니다.

노치원 노래방 시간에 회원 한 분이 앞에 나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라는 곡이었습니다. 임영웅이 부른 노래였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의 궤적 또한 그 잔잔한 음악들의 결을 닮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해 목말랐던 청춘의 번민, 앞만 보고 달리던 장년의 분주함,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맞이한 황혼의 고요함까지. 클래식의 웅장함이든 저잣거리 노랫가락의 소박함이든, 음악은 단 한 번도 나를 다그치거나 평가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곁에서 묵묵히 내 한숨을 들어주고 외로움을 감싸 안아주었으며, 잊고 살았던 곁 사람의 소중함을 깨우쳐주었을 뿐입니다.

소리를 내어 목청껏 부르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음악은 언어 이전의 언어로 조용히 말을 건네왔습니다. "참 고생 많았다, 그 모든 결핍을 견디며 참 잘 살아왔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과 함께 여기까지 참 예쁘게 걸어왔다" 하고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청춘의 유행으로 시작되었던 음악과의 인연이, 평생을 거쳐 내 영혼과 사랑을 떠받쳐주는 거대한 버팀목이 되어준 셈입니다. 이제 음악은 나에게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인생의 마지막 안식처이자 가장 신실한 벗입니다. 눈은 점점 침침해지고 걸음걸이는 더디어지지만, 귀를 통해 가슴으로 들어오는 이 고요한 울림은 날이 갈수록 더없이 맑고 그윽해집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선율들은 단순한 지난날의 추억이 아니라, 가난했던 젊은 날의 나를 보듬고 나와 함께 늙어가는 아내의 손을 따뜻하게 잡게 해주는 온화한 사랑의 품입니다.

오늘 밤도 작은 화면 속에서 쇼팽의 야상곡이 나지막이 시작되고, 내 입가에는 아내를 향한 소박한 노랫말이 은은히 감돌고 있습니다. 굳이 곡의 제목을 다 외우지 못해도 좋고, 어려운 음악적 뜻을 헤아리려 애쓰지 않아도 참 좋은 시간입니다. 서글프면서도 따스한 피아노 선율과 가요의 정겨운 가사가 방안을 채우면, 아득한 대학 시절 고전음악 감상실의 어스름한 조명과 아내와 함께 걸어온 수많은 기억이 밤하늘의 별처럼 조용히 빛을 발합니다.

음표를 읽지 못하는 문외한이면 어떻고,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음치면 또 어떻습니까. 내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던 고전음악과, 황혼에 이르러 아내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따스한 노랫가락이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내 가슴을 따뜻하게 두드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음악이라는 오랜 친구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거니는 이 황혼의 길은 참으로 따스하고 아련하며 평화롭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이 조용한 선율과 사랑 속에 머무는 한, 내 삶은 언제나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악장이 됩니다. '별빛 같은 사랑아'가 황혼의 가슴에 별 하나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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