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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머무는 뜰] 수천 년의 시간이 맺어준 우정

지역뉴스 | | 2026-08-12 10:09:08

삶이 머무는 뜰, 조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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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혜 수필가

 

몇 달 전 크루즈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대륙의 북쪽 끝 알래스카. 실은 크루즈엔 별 기대가 없었다.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땅을 두 발로 디딘다는 설렘에 난생처음 타보는 압도적인 규모의 여객선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다. 여행을 마치고 남은 건 빙하 앞에서 느꼈던 황홀함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내 맘을 고요히 울리는 건 묵직이 물길을 가르던 배에서 좋은 사람들과 쌓은 추억이다.

14층 높이의 초대형 유람선은 웬만한 시설이 다 갖춰진 하나의 독립된 도시 그 자체였다. 출렁이는 파도에 발걸음을 휘청거릴 때를 빼곤 그곳이 배 안이라는 것조차 실감하기 힘들었다. 사람도 어마어마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결정체 속으로 향하는 하얀 섬에 몸을 실은 승객과 승무원이 무려 4천여 명이었다. 우리 모두는 운명 공동체였다. 정해진 항해 일정을 따르며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육지에 닿는 것이었다.

기항지에 도착하기 위해 꼬박 하루를 배에서 보내기도 했다. 이런 날엔 우람한 쇳덩이의 무게에 압도당하는 듯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마다 내게 위안을 준 것이 피오르 협곡 사이로 펼쳐지는 맑고 시린 물결과 따뜻한 심장을 지닌 사람들이다. 우리 방 청소를 맡았던 객실 승무원도 그중 한 명이다. 

처음엔 눈이 마주치면 웃음을 머금은 채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를 그저 서비스 정신이 뛰어난 직원이라 여겼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날수록 의무적으로 짓는 표정 같아 보이지 않았다. ‘저토록 맑고 상냥한 눈빛 속엔 어떤 삶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지만 여기서 내리면 더 이상 기회가 없지 않은가. 나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용기 내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을 ‘니리’라고 소개했다. 4년째 크루즈 승무원으로 일하는 20대 후반의 마다가스카르 청년이었다. 아프리카 동남쪽 해안을 홀로 지키는 외딴 섬, 오래오래 대륙과 단절되어 원시적인 자연미를 간직한 마다가스카르. 그곳은 꿈에서라도 가보고 싶은 곳, 오래전부터 동경해온 ‘0순위’ 여행지였다. 쉽게 갈 수 없어 더 간절해지는 나라의 사람을 망망대해에서 만나다니! 정말 운명 같은 조우였다.

그를 알아갈수록 특별한 만남에 대한 감사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청춘에 대한 감탄으로 변해갔다. 아직은 척박한 땅, 가능성을 발견하기보다 한계에 부딪혀 주저앉는 것에 익숙한 야생의 섬에서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픈 꿈을 키웠다. 전문대학에서 컴퓨터를 배운 뒤, 국제 어학 기관에서 비즈니스 회화 과정까지 수료한 것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크루즈 승무원은 한 번 승선하면 고립된 환경 속에서 열흘 가까이 일해야 하는 직종으로, 업무 강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그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영어 실력을 키우고,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그의 얼굴에 밴 미소가 호락호락하지 근무 환경과 어려움들을 넉넉하게 헤쳐 나가도록 도와주었다.

깊은 바다로 나아갈수록 자그마해지는 육지처럼 놓고 오지 못한 고민들로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질 때도 니리 덕에 웃을 수 있었다. 그는 하루에 서너 번 우리 방을 청소해주었는데, 특별히 저녁엔 수건으로 동물 모양을 만들어놓으며 안부를 전했다. 원숭이, 백조 등 그의 정성이 담긴 수건 장식을 차마 풀지 못해 퇴실 무렵엔 크지 않은 방이 작은 동물원이 되었다.

일주일 남짓의 여정이 끝나던 날, 이대로 인연을 매듭 짓기 아쉬워 그의 이메일 주소를 물었다. 그러곤 현실에 치여 한두 달을 정신없이 흘려보냈다. 차일피일 연락을 미루다 얼마 전 메일을 보내긴 했으나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에겐 내가 수많은 승객 중 하나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며칠 후 소식이 왔다. 메일을 읽는 내내 그의 얼굴에 가득하던 순박한 미소가 떠올라 다시금 얼어붙은 시간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탔던 배를 끝으로 니리 역시 또 다른 도전을 위해 고향의 품으로 돌아갔다. 

“몸은 마다가스카르에 있지만 자주 바다 위에서의 일들을 떠올려요. 나를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키워준 소중한 경험을 쉽게 잊지 못할 거예요. 무엇보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감사해요. 당신처럼요.”

우린 앞으로도 종종 소식을 전하기로 약속했고, 메일과 소셜 미디어로 소통하며 지구 반 바퀴에 가까운 물리적 거리를 좁혀가고 있다. 

짧은 날 동안 빙산과 그 아래 펼쳐진 초원,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자연을 구석구석 누리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미련은 없다. 때론 사람이 풍경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웃는 듯 선한 인상으로 내 방을 부지런히 치워주던 고마운 니리는 당연히 그 여행을 음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중한 인연이다. 식당에서 자주 마주쳤던 노년의 미국인 부부도 포근한 기억의 한 조각으로 남았다. 농장을 운영한다는 그들은 우리 가족의 배 멀미를 걱정하며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은 다정한 성품의 여행객이었다. 가축을 키우다 일어난 유쾌한 소동에 대해서도 많이 들려주었는데, 천방지축 가축 이야기를 들으며 실컷 웃던 순간은 우울한 어떤 날의 활력이 되어줄 것이다.

언젠가는 마다가스카르에 갈 날이 오겠지? 니리가 나고 자란, 그와 같은 순수함을 간직한 붉은 섬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할 날이 무척 기다려진다. 그날엔 수천 년을 머금은 빙하 곁에서가 아니라 인간 생보다 수백 배 긴 삶을 지탱해온 바오밥 나무 그늘에서 밀린 이야기들을 정겹게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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