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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생계 나 몰라라, 책만 사 모으는 아버지가 답답합니다

한국뉴스 | | 2022-04-07 09:11:45

오은영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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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Q : 명문대 졸업한 50대 후반, 사회 비평 작가라지만 무명…생계는 고스란히 어머니가 떠안아 책은 한 달 평균 15권 정도 사, 현실과 동떨어지고 정치 편향적…상식적인 대화라도 통했으면…

가정 생계 나 몰라라, 책만 사 모으는 아버지가 답답합니다
가정 생계 나 몰라라, 책만 사 모으는 아버지가 답답합니다

아버지는 20년 가까이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정 생계는 나 몰라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책을 읽거나 정치 편향적인 유튜브만 보세요. 작은 일에도 버럭 화를 내고 말도 점점 안 통합니다.

 

아버지는 50대 후반으로 명문대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셨다고 해요. 졸업 후에는 취업을 하지 않다가 형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가게 일을 할 때도 하루 3, 4시간 정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독서와 글쓰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게에서 일하던 어머니와 만나 결혼하셨어요.

 

아버지는 이곳에서 10년쯤 일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 문제가 생기면서 일을 그만두셨습니다. 그게 벌써 18년 전입니다. 아버지는 이후 다른 일은 해본 적 없고 일을 구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은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돈 버는 일을 하찮고, 시시하고, 천박한 일이라는 식으로 말하세요.

 

그동안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지셨습니다. 어머니는 통계조사 아르바이트, 가스 점검 아르바이트, 우유 배달 등을 하시며 돈을 버셨어요. 그러다 운 좋게 괜찮은 중소기업에 들어가셨고, 덕분에 경제적 형편이 많이 나아졌어요. 제겐 누나가 한 명 있는데 자폐가 있어요. 아버지는 누나의 통학을 도와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안일과 양육에도 무관심했습니다. 유일한 대외 활동은 문학 동호회 모임이었는데 최근에는 동호회 사람들과도 소원해진 것 같아요.

 

현재 아버지의 명목상 직업은 작가지만 무명이고, 사회 비평을 주로 하시는데 글솜씨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내가 앞으로 시대의 명작을 써낼 위대한 인재이고, 노벨상 감’이라고 늘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쪼들려도 책을 한 달 평균 15권씩 사세요. 집에 더 둘 곳도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른바 ‘국뽕’ 유튜브와 친정부 성향의 유튜브에 빠지셨습니다. 특히 정치와 관련해서 조금이라도 자기와 다른 생각을 얘기하면 엄청 화를 내세요.

 

이러니 갈수록 일상적 대화가 힘들어집니다. 아버지는 제가 취업 시장이 어렵다고 한탄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자격증이 있었나, 면허가 있었나”라는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저희 어머니가 누나 관련해서 “장애인 단체에서 권리 보장 시위를 한다더라”고 하면 아버지는 “그런다고 정부가 뭘 하겠나”라고 하십니다. 본인 딸이 장애인인데도요.

 

얼마 전에는 “애는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큰다”는 말을 하셨는데, 아버지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힘들었던 어머니와 제 입장에선 너무 충격적인 발언이었죠. 저는 학창시절 성적이 좋았고 성실해 명문대 공대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제 와서 돈을 버는 것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상식적인 대화가 통했으면 좋겠어요. 저희 아버지는 왜 이러는지, 제가 저와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심리학에 관심이 생겨 찾아보다 알게 됐는데, 아버지가 혹시 자기애성 성격장애일까요? 이런 가정 환경에서 자란 저에게 조언해 주실 게 있다면 그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이정호(가명·24·대학생)

 

정호씨, 20년 넘게 한집에 살며 아버지를 마주칠 때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피할 수도 없는데, 일상적 대화조차 힘들어지니 숨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아버지라는 존재가 당신 인생의 난제로 여겨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야 하는 사람인데 정호씨를 늘 고민하게 하고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 그 난제가 바로 아버지였을 거예요.

 

사연을 읽어 보면, 당신이 아버지에게 거는 기대는 크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도 아버지를 싫어하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사연을 보낸 데는 아버지를 인간으로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당신은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사람입니다. 계획하고 성실히 노력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 왔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애써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아버지를 마주할 때마다 화가 치밀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답답함을 느끼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아버지는 자아도취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사회성 발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람으로 보여요. 지능에 문제가 없고 좋은 대학은 나왔지만, 타인의 입장이나 생각, 감정,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역량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때로는 부딪히고,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공포에 가까울 만큼 두렵게 느껴졌을 거예요.

 

아버지는 또 이를 ‘내가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있다’고 문제를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대신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세계를 형편없고, 천박하다는 식으로 깎아내리지요.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로, 고고한 나는 거기 섞이기 싫다고 표현합니다. 정호씨 집안에서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부모로서 제 역할을 못했던 이유도 사회성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가족은 사회적 관계 중에서도 원초적이고 근간이 되는 관계이지요. 아버지는 이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 안에서도 남편으로서, 부모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요. 건강 문제 같은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닌데 경제 활동에 참여할 시도조차 하지 않지요.

 

비유하자면 아버지는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를 쓰는 사람인 것 같아요. 책은 인간과 세상에 대해 글로 설명돼 있잖아요. 수시로 바뀌는 현실과 다르게, 책 속은 변화무쌍하지 않고 언제나 고정돼 있지요. 그러니 아버지처럼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책 읽는 건 편해도, 사람을 대면하는 건 어려운 거예요. 아버지가 책에 몰두하는 건 이런 이유로 보여요.

 

상대의 의도나 감정과는 관계없는 말만 하는 것도 사회적 상호작용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일방적인 주장만 하고요. 이건 성격이 내성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보통 자식이 취업이 힘들다고 하면, 부모는 “그래 옛날에는 공대생이면 취업 잘했는데, 너도 걱정이 많겠다”라고 공감해주거나 “그래도 너는 성실하고, 실력도 있으니까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를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석가모니 이야기를 꺼내죠. 자식과의 대화에서도 대화의 대상인 자식은 없고 아버지 자신만 있는 거지요. 일상에서도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단어를 구사하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가 많을 거예요.

 

결정적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이런 면을 인정하지도 않고 바꾸려 노력하지도 않지요. 아버지가 형의 가게에서 일할 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생활에서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용인해 줬던 것도 결과적으로 아버지가 이런 태도를 고칠 기회를 놓쳐버린 것 같아요. 가족이 운영하는 일터가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오랫동안 본인이 편할 때 하루 3, 4시간씩만 일을 하고 월급을 받기 힘들었을 거예요.

 

아버지가 나이가 들수록 작은 일에도 화내고 말이 안 통하는 건 내면이 불안하기 때문으로 보여요. 사람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거대한 사회와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지요. 잘 모르니 불안한 거예요. 보통 나이가 들면 경험이 쌓이면서 좀 더 유연해지는데 아버지는 인생에서 어떤 새로운 경험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바뀌고 내가 알던 세상과 갈수록 멀어지니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아버지가 한쪽의 정치적 견해만 대변하는 유튜브 영상을 즐겨 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나와 다른 생각과 감정, 의견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러니 자신과 똑같은 견해를 담고 있는 영상만 일부러 찾아보면서 내적으로 편안함을 느낍니다. 상호작용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소통이죠. 이럴수록 자기 세계에 갇히게 돼요. 고집, 아집이 세지고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보면 화가 나고, 이를 짜증을 부리고 신경질을 내는 식으로 미성숙하게 반응하지요.

 

저는 정호씨한테 아버지와 민감한 주제로 논쟁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토론을 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그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절충과 합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이 애를 쓰게 되고, 아버지의 반응으로 당신이 상처를 입을 거예요. 정치, 종교, 사회, 외교, 안보와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피하고, 아버지와의 대화는 의식주와 관련된 내용으로 한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고 이런 대화가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당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할 수 있을 겁니다. 아버지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당신의 삶을 가치있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당신은 아버지와의 관계로 인간 관계에 회의적일 수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애써 이해해야 했고, 작은 문제도 설득해야 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사람이 지긋지긋할 수 있지요. 하지만 성장하고 성숙하려면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는 꼭 필요해요. 당신이 보기에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조금이라도 마음이 통하는 구석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과 교류를 늘려 나가세요.

 

아버지가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지만 설득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여기에 너무 힘을 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인생은 당신이 감당할 몫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보다는 정호씨 당신의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충분히 할 만큼 했습니다. 문제를 극복하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문제가 너무 자신을 힘들게 하면 좀 피해 가도 돼요. 그건 무능한 게 아닙니다. 때로는 그게 자신을 아끼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정리=송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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