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만에 열어 본 냉장고 채소보관실의 상태는 처참했다. 오이는 썩어 흐물흐물해졌고, 비닐봉투 아래에는 물이 고였다. 브로콜리와 시금치는 누렇게 색이 변했다. 양상추는 거뭇거뭇한 반점이 잔뜩 생겼다. 가장 안쪽에는 상처 입어 갈변한 사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코로나19로 집밥 먹는 날이 늘어나 각종 채소와 과일을 한가득 사들여 넣어 두고는 다시 외식과 배달음식에 집착한 결과다. 가장 큰 책임은 게으른 냉장고 주인에게 있지만 이 사태를 가속화시킨 원인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식물호르몬 ‘에틸렌(Ethylene)’이다.
작물 생장과 노화 관여하는 식물호르몬 에틸렌
사과·복숭아·자두·살구·아보카도 특히 많아
장기간 보관 위해서는 사과의‘겨울잠’유도
▲식물호르몬 에틸렌, 작물 품질 저하의 원인
10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에틸렌은 과일이나 채소가 익으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식물호르몬으로 식물의 숙성과 노화를 촉진시킨다. 수확 후에도 식물의 기공에서 가스로 배출된다. 다른 호르몬과 달리 기체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동이 쉽다.
에틸렌은 덜 익은 상태에서 수확한 과일을 균일하고 빠르게 숙성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과육을 무르게 하거나 엽록소를 분해해 누렇게 변색시키는 등 농산물 품질 저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호르몬이다.
러시아의 과학자 드미트리 넬류보프가 1901년 에틸렌을 처음 발견했다. 1934년 영국 과학자 리처드 게인이 사과에서 발생하는 기체가 에틸렌이란 것을 화학적으로 증명했다. 에틸렌은 무색의 가스로 약간 단 냄새가 있고 인화성이 있다. 올레핀 탄화수소 계열에 속하는 간단한 화합물로 화학식은 CH₂+CH₂(C₂H₄)다.
작물을 수확하거나 잎을 절단하면 절단면에서 에틸렌이 발생하는데, 에틸렌은 한번 생성되면 스스로 합성을 촉진시키는 자가 촉매적인 성질이 있다. 식품조직에서 에틸렌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인위적으로 생성 및 작용을 억제하기가 불가능해 초기에 생성을 억제하는 게 중요하다.
▲에틸렌 많이 내뿜는 사과 복숭아 자두는 따로 보관해야
과일이나 채소마다 에틸렌 발생량이나 에틸렌에 민감한 정도는 다르다. 에틸렌을 많이 내뿜는 작물로는 △사과 △복숭아 △자두 △살구 △아보카도가 꼽힌다. 반면 에틸렌에 매우 민감해서 영향을 많이 받는 작물로는 △키위 △감 △자두 △수박 △오이 △브로콜리 등이 있다. 에틸렌은 조직을 연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연화가 진행되면 수송성과 질감, 저장성이 떨어지고 미생물에 의해 쉽게 부패가 진행된다.
브로콜리 파슬리 시금치 같은 녹색채소는 에틸렌에 의해 엽록소가 분해돼 누렇게 변색되는 황화 증상이 일어나고, 양상추는 반점이 형성되며 당근은 쓴맛이 증가한다. 감자나 양파는 싹이 나고 아스파라거스는 조직이 질겨진다. 과일의 경우 물러진다.
전문가들은 사과와 복숭아처럼 에틸렌이 많이 발생하는 작물은 다른 작물과 따로 보관하는 것을 추천한다. 절단면에서 에틸렌이 특히 많이 나오므로 상처 난 작물을 따로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에틸렌은 낮은 온도와 산소 농도 8% 이하, 이산화탄소 농도 2% 이상인 환경에서 발생이 감소하므로 공기를 차단하는 식품용 랩으로 개별 포장해 저온 보관하는 것이 좋다. 권헌중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소 연구원은 “설 명절 선물 세트로 인기가 높은 사과와 배의 경우 함께 포장돼 있는 경우가 많은데, 오래 두면 배 껍질이 검게 변하고 과일이 퍼석퍼석해지니 가정에서는 이를 따로 분리해 보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대로 에틸렌이 유익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감의 떫은 맛은 타닌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이를 없애 주는 것이 에틸렌이다. 권 연구원은 “떫은 감을 밀폐된 공간에 놓고 상처난 사과 몇 개를 같이 두면 떫은 맛이 쉽게 빠진다”라고 설명했다. 아예 이 원리를 이용한 과일 포장 방법도 있다. 위 아래가 나뉜 2단 박스 위에는 떫은 감을, 아래에는 사과를 두고 보관하면 홍시로 만들 수 있다.
바나나 후숙처리에도 에틸렌이 사용된다. 외국에서 수확할 때는 초록색인 바나나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이동하는 동안 노랗게 익게 되는데, 미처 다 익지 않은 경우 에틸렌 1~10ppm, 온도 20℃, 상대습도 90~95%에서 1, 2일 처리하면 노랗게 익는다.
▲‘1-MCP’ 가스 처리로 사과는 ‘겨울잠’
과일의 성숙과 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만큼 사과 장기 보관에 에틸렌 제거는 필수적이다. 과거에는 에틸렌 제거를 위해 숯을 흡착제로 썼다. 숯의 무수히 많은 미세구멍들에 에틸렌, 이산화탄소 등 냄새가 나는 기체를 흡착시켜 제거하는 방식이다. 냉장고 냄새를 없앤다고 숯을 이용한 탈취제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20여 년 전부터는 사과 자체에서 내뿜는 에틸렌을 억제하는 방법이 사용된다. 사과 농가들은 무색 무취의 1-MCP(1-Methylcyclopropene) 가스를 사과 장기 저장에 널리 활용하는데, 이를 통해 다음 햇사과가 나올 때까지 약 1년간 맛의 변화 없이 보관이 가능해졌다. 1-MCP 가스는 농산물의 에틸렌 수용체와 결합해 에틸렌 가스의 작용을 차단한다. 화훼류에 주로 사용되다 2002년 미국 환경청(EPA)에서 식품 중 처음으로 사과에 사용하는 것을 허가했다.
권 연구원은 “사과가 호흡을 많이 할수록 품질이 떨어지니 수확 후에는 호흡을 적게 하도록 만들어 품질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게 핵심”이라며 “밀폐된 저장고의 온도를 낮추고 16~24시간 동안 1-MCP 가스로 훈증한 뒤 환기하고 저장을 하면 마치 곰이 겨울잠을 자듯이 사과가 숨을 거의 쉬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박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