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현장엔 검은연기…비극현장 앞 추모공간, 어린이 희생자 기리는 곰인형도
목격자들 눈물의 증언, 끊이지 않은 애도 발길…우크라 관련설엔 의견 분분
‘삼엄한 통제’ 폐쇄된 붉은광장 긴장감 고조…”이것은 도발, 러시아 단결할 것”
23일(현지시간) 찾아간 모스크바 북서부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 앞.
삼엄한 경찰의 통제로 공연장 건물 가까이에는 다가갈 수 없었다.
하지만 멀리서도 검게 그을려 뼈대만 남은 공연장 건물이 보여 화재의 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재로 인해 이 공연장 지붕은 일부 무너졌다.
아직 화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듯 공연장 주변에는 검은 연기가 바람을 타고 떠다녔다. 공연장 건물 주변에는 소방차와 사다리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경찰들은 주차장 울타리 밖까지만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했다. 이 때문에 주차장 울타리 한쪽에 자연스럽게 테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공간이 마련됐다.
이 공간에는 온종일 꽃과 양초를 두고 가는 추모 인파의 발길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끔찍한 테러에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어린이 희생자를 애도하려는 듯 대형 곰 인형을 비롯한 봉제 인형들도 눈에 띄었다.
전날 록 그룹 피크닉의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었던 이 공연장에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괴한들이 침입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뒤 불을 질러 130여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3째로 접어든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5기 대관식에 찬물을 끼얹은 20년만 최악의 테러에 모스크바와 러시아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푸틴 대통령은 24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 "아이들까지 희생되다니"…거리엔 애도 촛불 영상
카자흐스탄 출신 정치전문가 아크보레 아빌카시모바 씨는 "어제 뉴스를 보고 한숨도 못 잤다"며 "끔찍했고, 충격적이었다.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라며 붉은 꽃다발을 들고 이곳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2000년대 이후 모스크바에서 대형 테러 사건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이번 테러는 2004년 체첸 분리주의 반군이 일으켜 33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베슬란의 초등학교 테러 이후 최악으로 꼽힌다.
아빌카시모바 씨는 "모스크바는 아주 안전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도시"라고 강조하면서 "이런 곳에서 평화로운 사람들과 아이들이 공격받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26세 남성 에고르 팔레프 씨는 전날 테러 소식을 듣자마자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와 밤을 새웠다고 했다.
팔레프 씨는 "어젯밤 10시 50분에 도착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며 이날은 추모 공간 주변을 지키고 있다고 전했다.
평소 같았으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손님으로 북적였을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 인근 대관람차는 이날 멈춰선 채 운행하지 않았다.
모스크바 거리와 지하철역 곳곳에 설치된 디지털 광고판에는 이번 테러와 관련해 '애도합니다. 2024.3.22' 글귀와 함께 검은 바탕에 촛불이 흔들리는 영상이 나왔다.
◇ 죽음의 위기에서 탈출한 목격자들 생생한 증언
이날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 앞에는 테러를 직접 겪은 목격자들도 와서 취재진에게 자신이 겪은 비극적 상황을 설명해줬다.
전날 가족과 함께 피크닉 콘서트를 보러 왔었다는 아나스타샤 로디오노바 씨는 "그들(테러리스트)은 '엎드려!' 이런 말도 없이 조용히 걸어 들어와서 사람들을 쐈다. 소리가 흩어져서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 동생의 아내는 시체 위를 달렸다고 한다. 정말 무서웠지만, 나중에 우리가 운이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집에 돌아와 보니 재킷은 피범벅이 돼 있었다. 5분만 늦었어도 우리는 총에 맞았을 것"이라며 몸서리를 쳤다.
또 "그들은 재밌다는 듯이 걸어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다. 총을 맞는 사람이 여자인지, 어린이인지, 노인인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며 분노를 표했다.
다른 목격자 마르가리타 씨는 "사촌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쾅' 소리가 났다. 가수들이 등장해 폭죽이 터진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소리는 '뚜뚜뚜뚜뚜뚜뚜뚜' 기관총 소리였고, 비명이 이어졌다"고 떠올렸다.
이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고 남편과 같이 위로 뛰어 올라갔다"며 "아래층으로 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테러리스트들이 복도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마르가리타 씨는 남편과 비상구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내려가기 두려웠다. 완전히 어두웠다"며 "처음 내려간 사람들이 문을 열자 빛이 들어왔고 우리는 출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뛰어나왔지만, 쾅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고 말했다.
◇ "이것은 도발"…"러시아는 단결할 것"
이번 사건은 지난 15∼17일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의 5선이 확정,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 의욕을 보이는 상황에서 발생해 러시아에 더욱 큰 충격을 던졌다.
30년 장기집권의 길을 연 푸틴 대통령의 '차르 대관식'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라는 분석이다.
30대 모스크바 시민 이리나·알렉산더 부부는 선거 이후에 이런 사건이 발생한 점에 대해 "저희 의견은 이것이 도발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다만 "많은 사람은 이 사건을 우크라이나가 벌였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반면 또 다른 이리나(45) 씨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당신도 아는 '그 일' 때문에 이 사건이 벌어졌을 것"이라며 러시아가 3년째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이 사건과 관련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저는 나이 든 사람으로서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의 돈을 받고 공격한 것 같다. 계획된 테러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번 일은 러시아를 하나로 모을 것"이라며 "전장에서 죽고 있는 군인들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자신의 전투원들이 벌인 일이라며 테러의 배후를 자처한 가운데 러시아는 용의자들의 우크라이나로 도주를 시도했다며 우크라이나 관련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를 강력 부인하고 있다.
◇ 삼엄한 경계 속 모든 게 멈춘 모스크바…봉사·헌혈도
푸틴 대통령이 24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지만 이미 모스크바는 일상을 멈추고 희생자를 애도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각종 문화·스포츠 행사와 학교 수업들도 취소됐다.
테러의 악몽 속에 긴장감도 흐르고 있다.
모스크바의 심장 붉은광장은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여 출입이 완전히 차단됐다. 지하철 보안 직원들은 배낭을 메거나 큰 짐을 든 사람들을 불러세워 위험 물질이 있는지 검사하고 있었다.
아파트 경비원들도 방문객 검문을 강화했다. 음식 배달원들은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 주문자에게 전화해 경비원을 바꿔주고 나서야 배달을 마칠 수 있다.
테러 충격을 온정을 나누며 극복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과 가까운 먀키니노 지하철역 앞에는 '모스크바 자원봉사단' 점퍼를 입은 청년들이 추모객들을 안내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나눠줄 물과 과자를 두고 간 사람들도 있었다.
모스크바의 혈액 센터들에는 희생자들을 위해 헌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국가대표 선수들도 앞장서서 헌혈에 동참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