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막바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세기말적 현상들 가운데 하나는 ‘정치의 종교화’이다. 정치가 점차 합리적 판단과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믿음과 맹신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음모론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도덕적·윤리적 하자가 쏟아져 나오고 심지어 위법 행위로 사법적 판단을 받아도 무조건 옳다고 믿는 맹목적 추종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정치가 마치 생사를 놓고 벌이는 물러설 수 없는 전쟁과 같은 양상으로 계속 변질돼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그런 운명을 걸고 벌이는 건곤일척의 대회전이 바로 선거이다.
그런 만큼 선거 결과는 누군가에게 정치적 상처와 심리적 후유증을 남겨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상흔은 정치의 종교화 속에 한층 더 깊어지고 있다. “왜 정치적 파워를 잃는 게 마치 나라를 잃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걸까”라며 얼마 전 뉴욕타임스가 던진 질문은 이런 심리적 상흔을 실감나게 표현해주고 있다.
선거패배가 극심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속성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행태과학자인 타드 로저스 교수는 이것을 ‘허위합의 효과’(false consensus effect)로 설명한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은 선거에서 양당 지지자들 모두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 여기는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론조사나 미디어 예측 등과는 상관없이 거의 절반의 유권자에게 선거패배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로 다가오게 된다.
로저스 교수팀 연구에 따르면 선거패배에 따른 슬픔과 고통은 보스턴 마라톤 테러,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같은 폭력 참사들이 안겨주는 부정적 감정보다 두 배가량 더 크고 깊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정파성이 우리의 정신적·사회적 삶에 미치는 영향이 날로 커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지난 2016년 대선 후 한 정신과 의사는 지지후보의 패배를 지켜 본 자신의 환자들이 겪었던 심리적 고통을 이렇게 기술했다. “그들은 패배가 악몽이 아닌 현실임을 깨달으며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다. 슬픔과 불안이 이들을 짓눌렀으며 일부는 침대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어떤 이들은 캐나다로 떠나겠다고 했으며 이른 아침부터 술로 분노를 달래기도 했다.” 이처럼 2016년 대선이 던진 충격파와 후유증은 어느 해 선거보다 크고도 길었다. 그러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PTSD)에 빗댄 ‘선거후 스트레스 장애’(Post Election Stress Disorder·PESD)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충격적인 선거 결과에 따른 정신적·신체적 장애를 지칭한 말이었다.
실제로 당시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 강세 지역에서 불안과 절망감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크게 증가했다.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열정, 그리고 기대를 후보들에게 투사한다. 선거철이 되면 유권자들의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가 늘어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선거 전과 투표 당일에도 그렇고 결과가 나온 후는 말할 것도 없다. 지난 5일 미국의 주권자들은 앞으로 4년 동안 나라를 이끌어갈 다음 지도자를 결정하기 위한 선택에 들어갔다. 승패에 따라 승자의 환희와 패자의 고뇌가 엇갈리게 되었지만 그 교차하는 감정의 무게가 같을 수는 없다. 무엇을 얻었을 때의 기쁨보다는 잃었을 때의 고통이 더 큰 법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기쁨이든 나쁜 일에 따른 고통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분노하기 보다는 부정적 감정을 부추기는 행위들, 가령 뉴스시청이나 SNS 등은 당분간 자제하면서 세로토닌과 옥시토신 같은 긍정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는 신체활동과 취미생활에 집중한다면 ‘선거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패배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의연한 자세가 중요하다. 절망감에 찌들어 축 늘어져 있을 게 아니라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듯 삶은 계속될 것이고 당신 앞에는 또 다른 선택의 기회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LA미주본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