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의 역사
생수가 없었던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 서울로 가족 나들이를 갔다가 롯데백화점 본점에 들렀다. 극심한 갈증에 시달렸지만 물을 마실 수 없었다. 팔지 않으니 살 수가 없는 것이었다. 탄산음료는 팔았지만 부모님은 갈증만 더 심해질 뿐이라며 마시지 못하게 했다. 조르고 졸라 결국 탄산음료를 사 마셨으나 부모님의 경고처럼 곧 갈증이 가중됐다. 경기 수원의 집으로 돌아오는 몇 시간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이제 아무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갈증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눈에 띄는 아무 편의점에나 들어가 병입 생수를 사 마시면 된다. 맑고 깨끗한 생수가 갈증을 순식간에 해소해 준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병입 생수의 역사는 200년도 더 됐지만 국내에서는 30년 전까지 사 먹을 수 없는 재화였다.
■페트병 발명… 용기 발전으로 비약적 성장
생수의 역사는 유구하다. 인류는 문명이 존재하는 시기부터 물을 용기에 담아 마셔 왔다. 물 배분을 위한 병입은 1622년 잉글랜드 몰번 힐스의 홀리 웰에서, 판매를 위한 병입은 1767년 미국의 잭슨스 스파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다. 온천욕과 물 치료의 유행을 타고 씻는 것은 물론 마시는 물로도 건강을 북돋자는 기대가 원동력이었다. 1809년에는 온천수의 탄산을 인위적으로 흉내 낸 탄산수의 특허를 조셉 호킨스가 최초로 취득했다.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생수의 큰 흐름은 프랑스에서 물꼬를 텄다. 범세계적 브랜드로 인기를 누리는 에비앙이다. 1790년 귀족 마르퀴스 드 르세르가 프랑스 남동부 도시 에비앙레뱅의 샘물 맛이 유달리 부드럽고 목 넘김이 좋다는 걸 발견했다. 그냥 목이 말라서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고, 신장결석 등 지병에 시달려 효용을 좇았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에비앙레뱅의 물은 1826년부터 도기 병에 담겨 팔리기 시작했다.
생수의 저변이 넓어지는 데는 용기, 즉 병의 발전이 가장 큰 계기로 작용했다. 첫 번째 계기는 19세기 유리병 기술의 대중화였다. 당시 사람들은 콜레라와 장티푸스 감염 가능성이 있다며 수돗물을 불신하고 병에 든 물을 선호했다. 덕분에 1850년경 미국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린 병입업체 사라토가 스프링스는 매년 700만 병에 이르는 물을 생산했다.
두 번째 계기는 코페르니쿠스적이라 할 수 있는 혁신이었다. 1973년 듀퐁의 연구원 내서니엘 와이어스가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ET·페트) 병을 발명한 것이다. 1946년 섬유의 원료로 개발·활용됐던 페트는 와이어스 덕분에 탄산음료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병으로 거듭난다.
■1960년대 한국선 상상할 수 없던 '사 먹는 물'
생수의 역사는 국내편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1912년 일본인이 충북 초정리에서 약수터를 개발해 '구리스타루'라는 상표로 천연사이다와 천연탄산수를 출시한 게 최초이다. 그렇다면 한국 생수의 역사도 100년이 넘는 셈이지만 문호는 이후 오랫동안 개방되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생수'가 미군부대에 납품을 시작한 게 1976년이니 64년이나 뒤의 일이다. 생수 판매가 금지됐기에 내국인은 끓인 수돗물이나 지하수를 마셔야 했다. 심지어 내국인에게 생수를 판매했다가 적발되면 업체가 행정 처분을 받았다.
그나마 1988년 서울올림픽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생수를 판매할 수 있었지만 외국인 대상이었다. 방한한 외국인들이 수돗물을 불신할 수 있다고 판단하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계약을 맺고 선수와 올림픽 관계자들에게만 생수를 제한적으로 공급했다. 이마저도 "사회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올림픽이 끝난 이후 다시 금지됐다.
생수업체들이 내국인에게 판매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상당수가 암암리에 생수를 사 먹었고, 당국도 알면서 단속하지 않았다. 1993년 10월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국내 14군데 허가 업체의 생수 연간 생산량 24만1,000여 톤 가운데 98%가 시중에 불법 유통되고 있었다. 무허가 업체의 생산량까지 합치면 국내 생수시장 규모는 연간 1,000억 원대에 이를 것이라 추산됐다.
국민 다수가 불법 행위를 저지른다는 의미였는데 명분이 없지는 않았다. 88올림픽 이후 오염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수돗물의 신뢰도가 떨어졌다. 1989년의 중금속 검출 소동과 1990년의 발암물질 트리할로멤탄 검출 파동 등이었다. 1994년 3월에는 두산전자에서 유출된 페놀 원액이 영남 지역 전체의 식수원인 낙동강을 오염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무려 30톤에 이르는 양이었는데, 두산전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같은 해 4월에도 페놀 원액 2톤을 추가 유출했다. 그 결과 식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국민 여론이 생수의 합법적 판매 쪽으로 기운 건 1991년 9월. 정부가 시판 허용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정치권이 걸림돌이었다. 국회의원들은 4대 총선이 6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 생수 시판을 허용하면 구매할 형편이 못 되는 유권자들의 위화감을 살 것이라 우려했다. 생수 판매 허용이 수돗물의 낮은 수준을 인정하는 셈이 될 것도 걱정했다.
■생수시장 발전 동력이던 페트병, 이젠 환경 빌런
온갖 이해관계가 얽히며 사회적 논쟁이 벌어졌다. 정부 관계자와 수질 전문가, 생수업자와 대학 교수 등 전문가들이 TV에 출연해 토론을 벌이는 한편, 생수업자들도 지속적으로 소송을 걸었다. 결국 생수 시판 허용 논란은 대법원에서 해결됐다. 1994년 대법원 특별 2부는 국민의 행복 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생수 시판금지 무효 판결을 내렸다. 결국 보건사회부는 1994년 3월 16일 생수의 국내 시판을 공식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88올림픽 이후 생수를 둘러싸고 빚어진 사회적 갈등이 막을 내렸다.
1995년 5월 생수가 시중에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규제와 조건이 붙었다. 보건사회부는 ‘먹는물관리법'을 제정해 생수 광고를 금지했다. 광고가 수요를 촉발해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과 환경 훼손을 야기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명칭 또한 '광천 음료수'로 일원화했고 제조 연월일과 수원지, 칼슘과 마그네슘 등의 성분 함량 표기를 의무화했다.
뒤늦게 출범한 국내 생수 시장은 나날이 팽창하고 있다. 판매 규모를 봐도 2010년 4,000억 원에서 2023년 2조3,000억 원으로 5배 이상 확대됐다. 특히 지난 5년 동안은 연평균 10% 성장하는 상승세를 보였다. 2022년 말 환경부에 등록된 생수 제조사는 약 60여 곳, 브랜드는 300여 개다. 이 중 제주 삼다수가 2022년 말 기준 시장 점유율 35.7%로 1998년 출시 이후 25년 동안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제주 삼다수는 농심의 생수 브랜드였지만 2012년 계약이 끝나면서 법정 분쟁까지 거친 후 결별했다. 현재 제주 삼다수는 광동제약이 공급하고 있다. 농심은 백산수를 판매하는데, 최근 수원지 표기를 두고 논란을 겪고 있다. 상품명부터 백두산의 물인 듯한 인상을 풍기지만 실제로는 42㎞ 떨어진 중국 지린성 내두천이 수원지이다.
페트로 인해 비약적 발전을 맞이했었던 생수 업계는 이제 다시 변화를 겪고 있다. 병입 생수의 편리함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지만 플라스틱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재활용이 가능해 환경친화성이 높은 캔에 담긴 생수가 등장하고 있다. 또 플라스틱 병입 생수 또한 두께를 최소화하고 라벨을 없애는 등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려 발버둥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