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 치료제 관련 물량과 예산
“1회분이라도 더” 여론의 압력에
정확한 수요예측 없이 과잉 구매
‘유효기간’점진적 늘렸지만 한계
3억 회분 중 최소 10% 연내 폐기
유례없는 재앙 극복‘사회적 비용’
혈세로‘비싼 수업료’내야 할 처지
시행착오 줄일 시스템 정비 우선
변이 대응 치료제 개발 서둘러야
식품위생법상 모든 식품에는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소비자의 건강을 위해서다. 입이나 주사를 통해 외부 물질을 받아들인다는 측면에서 보면 의약품도 광의의 식품이다. 따라서 당연히 약품에도 유효기간이 존재한다.
물론 약의 종류에 따라 유통기한은 다르다. 알약의 경우 알루미늄으로 개별 포장됐다면 제조일로부터 2~3년, 용기에 들어 있다면 개봉 후 1년이 유효기간이다. 알루미늄 포장 알약은 외부 공기와 차단된 상태라 유통기한이 길지만, 용기에 들어 있는 약은 공기에 쉽게 노출되므로 그만큼 기간도 짧다. 다른 약품도 대부분 외부 공기와의 접촉 여부에 따라 해당 기간이 달라진다. 병원·약국 조제약은 제조일부터 2개월 이내, 알약을 분쇄한 형태의 가루약은 1개월 이내 소비해야 한다.
연고제는 개봉 후 6개월 정도가 유효기간이다. 시럽형태의 약은 개봉 후 한 달, 안약도 개봉 후 한 달 이내 사용해야 한다. 일회용 인공눈물은 하루 안에 사용해야 하는데, 수분이 많고 투약 시 눈에 닿아 세균이 번식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 3년여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코로나19와 맞서온 백신의 유효기간은 어떨까. 당연히 경구용(經口用·입으로 먹는) 약제보다 유효기간이 짧다. 2021년 첫 시판 당시 아스트라제네카와 화이자, 모더나 백신은 6개월, 얀센 백신의 유효기간은 4.5개월로 발표됐다. 그러나 이후 유효기간 초과로 폐기물량이 늘어나자, 점진적으로 늘리는 조치가 이뤄졌다. 현재 국내 기준으로 따지자면 화이자 백신은 18개월, 노바백스는 12개월, 얀센 백신은 6개월로 늘어난 상태다.
문제는 필요성에 따라 유효기간을 계속 늘려오기는 했지만, 올해 6월 말 현재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의 결과적인 과잉 구매로 1조 원에 육박하는 세금이 낭비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2021년 코로나 창궐 당시, “단 1회분의 백신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구해야 한다’는 여론의 성화 때문에 정확한 수요 예측을 하지 않은 채 너무 많은 구매계약을 다국적 제약사와 체결했기 때문이다. 소량이지만 백신 거래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한 현황 파악은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2021년과 2022년 정부가 사들인 3억 회 분량에 육박하는 백신 가운데 최소 10% 이상이 유효기간 만료로 연내 폐기될 상황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코로나19 백신에서만 6,000억 원 안팎의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인 셈이다.
이종성(국민의힘) 의원실이 질병관리청에서 받은 자료도 같은 사연을 얘기한다. 이 의원실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3년(2020~2022) 코로나19 백신 구매에 7조 원가량을 투입했다. 2020년 2,223억 원, 2021년 4조5,161억 원, 2022년 2조2,163억 원이다. 지난해 7월 현재 계약 체결분량(2억6,270만 회)과 이후 추가된 물량까지 합치면 3억 회분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팬데믹이 종식되면서 상당 분량이 창고에 쌓인 채 유효기간 종료를 기다리고 있다. 1,176만 회분은 지난해와 올해 초 이미 폐기됐고, 현재 남은 백신(3,400만여 회분) 대부분도 유효기간 종료로 연내 폐기될 수밖에 없다. 백신별로는 △화이자 367만6,000회분 △화이자(소아용) 58만3,000회분 △얀센 189만7,000회분 △노바백스 34만8,000회분 △모더나(BA.1) 1만4,000회분 △화이자(BA.1) 644만5,000회분 △화이자(BA.4/5) 1,415만8,000회분 △모더나(BA.4/5) 616만1,000회분 등이 재고로 쌓여 있다. 질병관리청도 “추가적인 백신 접종으로 재고물량을 소화하면서 해외공여, 대조백신 제공 등에 활용할 계획이지만 잔여분은 폐기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코로나19 백신의 대량 폐기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독일, 캐나다, 일본 등 코로나19 국면에서 백신 접종에 적극 나선 대부분 선진국이 거액 예산을 들인 백신의 대량 폐기를 앞두고 있다. 독일의 경우 내년 말까지 공급되는 코로나19 백신 2억8,000만 회분이 유효기간 종료로 폐기될 운명이다. 화이자 등과의 입도선매 계약으로 의무적으로 구매해야 하는데, 팬데믹 종료로 백신 수요가 뚝 끊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정부는 제약사와 계약조건을 변경하는 등의 조치를 검토하고 있지만, 이미 독일 내부에서는 혈세 낭비라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6월 기준 일본의 코로나19 백신 재고량은 약 1억1,000만 회분이다. 이 중 6,000만 회분은 화이자, 5,000만 회분은 모더나와 아스트라제네카의 백신이다. 캐나다 역시 연말까지 최소 1,900만 회분의 백신을 폐기 처리할 예정이다. 캐나다 언론에 따르면 캐나다 연방정부가 현재 관리 중인 1,850만 회분 백신 가운데 1,680만 회분의 유효기간이 연말까지 만료된다. 민간에 뿌려진 것까지 감안하면, 연내 폐기 물량은 1,900만 회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예산낭비 논란은 코로나 치료제도 마찬가지다. 1명분당 가격이 60만 원이 넘는 치료제인 화이자의 팍스로비드와 라게브리오 등도 유효기간 만료에 따른 폐기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특히 팍스로비드는 전량에 가까운 분량이 소진될 것이라는 질병관리청의 관측에도 불구, 일부에서는 지금까지 수입한 156만 명분 가운데 상당수가 폐기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질병관리청은 ‘유효기간 종료에 따른 대량 폐기 가능성’에 대해 국회 예산정책처 등의 지적이 잇따르자 지난해 중반 이후 적극적 수요·공급 조절에 돌입했다. 유효기간을 늘리는 한편, 고위 당국자들이 의료현장에서 처방을 적극 권유했다. 그래서 올해 6월까지 수입된 156만 명분 가운데, 재고로 남은 물량은 37만3,000명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논란의 핵심은 눈에 띄게 감소한 관련 처방이다. 질병청은 팬데믹 시기의 처방 추세가 이어지는 걸 전제로 재고 소진을 주장하지만, 현장 반응은 다르다. 일선 약국에서는 이미 지난 3월부터 처방이 급감했으며, 최근 엔데믹 전환 이후에는 그 추세가 더 빠르다고 주장한다.
지구촌 대부분 국가가 코로나19 대응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해 왔다. 갑작스럽게 팬데믹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창궐 당시의 국민적 공포를 감안하면 남아도는 백신과 치료제 폐기비용은 유례없는 재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지불하는 ‘사회적 비용’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1조 원 세금을 수업료로 흔쾌히 지불하려면, 코로나19 대응과정에서 보건당국이 보인 실수를 방지하는 시스템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 정치 구호에만 국산 백신·치료제의 개발과 적극 사용을 유도하는 정책 당국자의 태도 변화도 절실하다. 지금이라도 코로나19 변이에 대응할 수 있는 획기적인 치료제 발굴도 계속돼야 한다.
<도성훈 연세우노비뇨의학과 대표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