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득 할머니 1일 별세
101살 파란만장 삶 마쳐
남은 위안부피해자 27명
또 한 명의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피해자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났다. 생존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는 27명으로 줄었다.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은 1일(한국시간) 새벽 4시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김복득 할머니(101살)가 지병으로 병실에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앞서 김 할머니는 2013년 자택에서 홀로 살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이 병원에 입원했다.
김 할머니는 1918년 경남 통영시에서 태어났다. 22세가 되던 해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징용 모집자의 말에 속아 고향 통영에서 중국, 필리핀 등지로 끌려갔다.
일제 강점기 타국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를 겪은 김 할머니는 해방 직후에야 가까스로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피울음을 토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기억에도 김 할머니는 주저앉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투사'의 삶을 살았다.
1994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정부에 등록한 김 할머니의 이런 행적은 2010년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언론에 소개됐다.
김 할머니는 2009년 11월 통영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직접 나서 통영시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시켜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2010년을 전후로 일본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해 본인이 겪은 참상을 수차례 증언하기도 했다. 2011년 12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인간 띠 잇기 행사가 열린 통영시 강구안 문화마당에 참석해 당시의 비극을 증언했다.
2012년에는 그간 생활비 등을 아껴 모은 2천만 원을 통영여고에 장학기금으로 내놨다. 경남도교육청은 이런 김 할머니의 뜻에 보답하듯 2013년 3월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제목의 증언록을 발간했다.
이후 이 증언록은 일본어와 영어, 중국어로도 번역돼 일본과 미국, 중국에도 발송됐다.
2009년 11월 2일 김복득 할머니가 통영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영시의회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해줄 것을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