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 보도 프로젝트’ 폭로
독재자·인신매매범도 고객
크레디트스위스 1,000억불 운용
스위스의 대형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에 비밀계좌를 가진 3만여 명의 명단이 공개됐다. 명단에는 독재자 가족은 물론 인신매매 등 파렴치범도 포함됐으며 전체 운용액은 약 1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객 확보를 위해 자금 출처도 무시하는 스위스 은행의 행태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20일(현지 시간)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이들을 포함해 세계 46개 매체가 참여한 ‘조직범죄·부패 보도 프로젝트(OCCRP)’가 익명의 크레디트스위스 내부고발자가 제공한 자료를 분석해 이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국가별로는 이집트와 베네수엘라가 각 2000여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우크라이나·태국도 각 1000여 명이 있었다. 이외에도 고객들은 필리핀·이란·파키스탄·카자흐스탄·케냐·스위스 등 전 세계에 걸쳐 있었다. 직업별로는 인신매매범·전범 등 범죄자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국가 수반과 장관, 정보기관장, 유력 정치인, 주교 등도 포함됐다.
OCCRP에 자료를 제공한 크레디트스위스 내부고발자는 “스위스의 은행 비밀보호법은 부도덕하다”며 “금융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는 구실은 스위스 은행들이 탈세자와 협력하는 부끄러운 일을 은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 자료에는 지난 1940년대부터 2020년 말까지 크레디트스위스에 개설된 계좌 소유자인 3만 7000여 명의 개인과 기업 정보가 포함됐고 스위스 주요 은행에서 유출된 자료로는 역대 최대 규모라고 OCCRP는 전했다.
가장 악명 높은 비밀계좌 소유자 중 하나는 필리핀 독재자였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과 부인 이멜다다. 이들은 크레디트스위스에 ‘윌리엄 손더스’와 ‘제인 라이언’이라는 가명으로 비밀계좌를 개설했으며 취리히 법원은 이들의 계좌와 관련해 크레디트스위스와 다른 한 은행에 5억 달러를 필리핀 정부에 반환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2006년 계좌가 폐쇄되기 직전에도 103억 원가량을 예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2008년 계좌를 개설한 스웨덴 컴퓨터 기술자 스테판 세더홀름은 2011년 인신매매로 종신형을 받은 후에도 2년 반 동안 계좌를 더 유지했다.
현재도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으로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이 크레디트스위스 계좌 6개에 2681억 원을 보유한 것으로 밝혀졌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 아들인 알라와 가말 무바라크도 2003년 2346억 원을 예치한 계좌를 개설하는 등 모두 6개의 계좌를 소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화권에서는 홍콩증권거래소 설립자인 고 로널드 리가 765억 원 규모의 계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상장 대가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크레디트스위스는 성명에서 “이 보도는 맥락에서 벗어나게 발췌된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정보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위스 은행들이 비밀계좌를 운영하는 것은 결국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는 평가다. 가디언에 따르면 스위스 금융기관들은 현재 약 7조 9000억 스위스프랑(1경 1000조 원)의 자산을 관리하는데 이의 절반 정도가 외국 고객이다.
가디언은 “불법 자금을 없애겠다는 수십 년에 걸쳐 계속된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노력이 실패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 최수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