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에 경고등 켜진 중남미 경제
작년 구리가격 25% 뛰었지만
최대수출국 칠레 화폐가치 급락
페루 등 좌파 진영 속속 집권
구리·철광석·리튬 등 자원 부국인 중남미 국가의 경제가 심상치 않다. 원자재 랠리에도 불구하고 수출 효과는커녕 통화가치 급락, 자본 유출까지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포퓰리즘 성격이 강한 정책을 펴는 좌파 정권이 중남미에 대거 등장하면서 가뜩이나 불안한 경제의 혼란과 혼탁 양상이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17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해 이후 구리 가격은 25% 올랐지만 세계 최대 구리 수출국인 칠레의 페소화 가치는 미국 달러 대비 연 17% 하락했다.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늘면 통화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반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칠레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중남미 통화도 모두 달러 대비 약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콜롬비아 페소화 가격은 달러 대비 16%, 페루 솔화는 9% 각각 떨어졌다. 브라질 헤알화의 하락 폭도 7%에 달해 5년 연속 평가 절하됐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정부의 집권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에르네스토 레빌라 씨티그룹 중남미 수석은 “전염병 유행으로 인한 타격은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유권자들이 포퓰리즘에 쏠리면서 정치적 위험이 더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대표적인 국가가 칠레다. 오는 3월 취임하는 가브리엘 보리치 차기 대통령은 민영 연금 제도를 폐지하고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하는 세금을 걷어 공공 지출을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환경 보호를 이유로 GDP의 10%를 차지하는 광산업을 금지하고 리튬 등 자원 개발을 국유화한다는 공약도 내놓았다.
페루와 온두라스도 지난해 6월과 11월 좌파 진영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5월과 10월에 대선이 예정된 콜롬비아와 브라질에서도 좌파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다. 브라질 유력 후보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은 국가 주도 산업 정책 등 반(反)시장주의 공약을 들고 나왔다. 그는 재직 시절 빈민층 현금 지급 등 무상 복지에 국가 예산의 약 75%를 투입한 바 있다. 현직 대통령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경제성장을 위한 구조 개혁 요구를 무시한 채 재선을 위한 지출만 늘리고 있다. 알베르토 라모스 골드만삭스 중남미담당자는 “중남미에서 정책 리스크가 커졌다”며 “수출품 가격과 통화 강세 간 양(+)의 상관 관계가 깨진 것은 이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나마 멕시코는 좌파 정부 집권에도 통화가치 하락 폭이 4.5%에 그쳤다. FT는 “멕시코 정부는 자유무역과 보수적 재정 규율을 추구하며 온건한 정책을 펴고 있다”고 분석했다.
선진국의 긴축 정책, 정정 불안 등과 맞물리며 해외 자본 유출도 늘고 있다. FT에 따르면 칠레에서 정치 불안이 불거진 지난 2019년 10월 이후 2년여간 500억 달러(약 59조 원)의 해외 자본이 빠져나갔다. 이는 칠레 GDP(약 2,529억 달러)의 20%에 가까운 규모다. 페루는 지난해에만 약 150억 달러의 자금이 유출됐다. 옥스퍼드이코노믹스의 수석 경제학자인 마르코스 카사린은 “브라질·콜롬비아·칠레 등의 환율에는 이미 정치 악재가 반영됐다”며 “수출 랠리에도 중남미의 통화가치가 오를 자격이 없다고 시장에서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수출 붐으로 인한 이점은 국가가 번영을 위해 노력할 때만 가능하다”고 꼬집었다.
<백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