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취임 1년

“인류가 원하는 곳으로 스트레스 없이 갈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서비스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최근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사업부 관계자들과의 대화 중 밝힌 신념이다. 오는 14일 취임 1주년을 맞는 정 회장은 전기차 및 수소차·UAM·로보틱스 등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모빌리티 사업의 지평을 한층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회장의 취임 이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룹사들의 실적 개선이다. 대표적인 예로 현대차는 정 회장 취임 전인 지난해 2분기 매출액 21조 8,590억 원, 영업이익 5,903억 원을 거뒀으나 올해 2분기에는 각각 30조 3,261억 원, 1조 8,860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코로나19와 반도체 품귀라는 악조건에서도 실적 개선을 이뤄낸 것이다.
정 회장은 친환경 모빌리티 회사로의 전환도 서두르고 있다. 첫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활용한 현대차의 아이오닉5를 지난 4월 출시해 시장에 안착시켰고 이후 기아 ‘EV6’도 호평을 받았다. 전기차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배터리 기술 협력을 위해 LG에너지솔루션과 인도네시아에 배터리 합작공장을 설립해 전기차 수직 계열화에도 결실을 보였다.
정 회장이 진두지휘한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도 미국을 중심으로 판매량이 급속히 늘고 있다. 제네시스는 미국에 이어 캐나다·중동·러시아·호주에 브랜드를 론칭했고 올해는 프리미엄 브랜드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중국과 유럽에 본격 진출해 글로벌 누적 판매 60만 대라는 기록을 앞두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G80 전동화 모델’과 첫 전용 전기차 ‘GV60’ 등을 출시해 고급 전기차 시장 진출도 서두르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강점을 갖고 있는 수소 기술도 정 회장 취임 이후 탄력을 받았다. 정 회장은 9월 ‘하이드로젠 웨이브’를 통해 ‘수소비전 2040’을 발표하면서 수소에너지의 대중화를 선언했다. 글로벌 모빌리티 기업 중 처음으로 2028년까지 모든 상용차 라인업에 수소연료전지를 탑재하겠다는 구체적 기술 로드맵도 제시했다. 특히 정 회장은 SK·효성·포스코 등과 힘을 모아 한국판 수소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수소생태계 조성을 위한 큰 그림도 그리고 있다.
미래 모빌리티의 한 축이 될 로봇과 UAM 투자도 서두르고 있다. 정 회장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12월 미국 보스턴다이내믹스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로보틱스 사업 육성을 선언했다.
보스턴다이내믹스의 4족 보행 로봇 ‘스팟’은 기아 완성차 공장에 안전 서비스 로봇으로 투입됐으며 사내 로보틱스랩을 통해 의료용 착용 로봇 ‘멕스(MEX)’와 인공지능(AI) 서비스 로봇 ‘달이(DAL-e)’ 등도 자체 개발을 하고 있다. UAM 분야에서는 미국 워싱턴DC에 2,000억 원 규모의 현지 법인을 설립하는 등 하늘 길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8년께는 수소연료전지를 활용한 UAM 기체도 내놓을 예정이다.
K.C.크래인 오토모티브뉴스 발행인은 올 7월 정몽구 명예회장의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의 리더십 아래 자동차 제조 기업에서 미래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그룹의 미래 방향성은 고객·인류·미래, 그리고 사회적 공헌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소개했다.
정 회장의 모빌리티 비전이 해외에서도 선도적 시도로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정 회장은 최근 들어 임직원과의 대화에서 ‘미래 세대’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한다”며 “‘전 지구적 기후변화 해법을 찾는 것은 우리 세대의 책임과 의무이며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절박함도 종종 내비친다”고 전했다.
직원들로부터 ‘굿 리스너’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소통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유연근무제, 복장·점심시간 자율화, 오픈 이노베이션 공간 확충 등은 내부 소통의 결과물이다. 정 회장의 이런 내부 소통은 이른바 ‘이순신 리더십’에서 비롯됐다는 전언이다.
정 회장은 과거 임원 워크숍에서 “거북선은 위에 쇠못이 있고 용두에서 연기가 나고 포를 발사하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외부의 완벽한 설계가 있지만 내부를 보면 수군이 쉴 수 있는 공간도 갖춰져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이순신 장군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룹 관계자는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고객으로 대했듯 현대차그룹도 직원을 고객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기업 역할의 창의적 변화는 내부 구성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게 정 회장의 소신”이라고 전했다.
반도체 품귀·지배구조 개편 등 과제도 산적
정의선호 직면한 과제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게는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당면 과제로는 ‘차량용 반도체 품귀 문제’가 꼽힌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현대차와 기아의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2.3%, 14.1% 감소했다. 세계적인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긴 탓이다. 현대차 투싼, 기아 쏘렌토 하이브리드는 출고까지 9~11개월가량 걸리는 등 적체 현상이 심각하다.
온라인 판매 확대 역시 지지부진한 상태다. 테슬라는 100% 온라인 차량 구매 시스템을 구축했고 메르세데스벤츠 역시 국내에서 온라인 신차·중고차 판매를 시행하고 있다. 현대차는 신형 경차 캐스퍼를 온라인 판매하는 데 성공했지만 노조의 반대로 온라인 판매 전면 확대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차의 중고차 시장 진출은 기존 중고차 매매업자들과의 합의점을 찾지 못하며 업계 간 상생 합의안을 도출하는 데 실패하면서 진출 시기가 불투명해졌다.
지배구조 개편은 정 회장의 해묵은 숙제로 꼽힌다. 주요 그룹사 중에 순환 출자 구조를 벗지 못한 곳은 현대차그룹이 유일하다. 지난 2018년 현대모비스의 모듈·AS 부품 사업을 현대글로비스와 합친 뒤 총수 일가의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매각한 자금으로 현대모비스 주식을 사들여 순환 출자 고리를 끊는 방안을 시도했으나 무산됐다.
이 밖에 사무·연구직 직원들의 성과급 불만, 생산라인 조정이나 해외 진출 때마다 반대 목소리를 내는 강성 노조와의 관계도 정 회장 앞에 놓인 과제들이다.
<이경운·김인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