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맥도널드를 선호하는 S 선생님과 버거킹을 선호하는 나와의 취향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햄버거 점을 찾기 전, 맥도널드나 버거킹을 선택하는데 의견 개진이 쉽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서로 미각의 차이가 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 햄버거의 독특한 맛이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왜 이러한 결정이 까다롭게 작용하는 것일까?
서로가 자신의 입맛에 길들어진 식생활에 익숙해 있다는 사실이다.
길들어지는 것에 익숙하면 자칫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지기 쉽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확신이 인간관계를 헤치며 벽을 쌓는 소지가 다분함을 유념해야 하리라.
S 선생님은 50년이 넘은 오랜 미국 생활에서 맥도널드 햄버거의 맛에 자연스럽게 길들어져 있음이다. 나 역시 이민 올 무렵 25년 전 한국에서부터 버거킹 햄버거의 맛에 길들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시절이나 지금도 워낙 햄버거를 좋아해서 자주 점심시간에 햄버거 전문점을 찾는다.
미국 생활에서는 쉽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햄버거를 먹게 되는데 늘 꿀맛이다.
먹고 마시고 하는 일을 감사함으로 한다면 즐거움이 배가되며 건강관리에도 유익하다.
식생활에서 까탈스러워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다면 사는 재미가 반감되지 않겠는가?
은퇴한 의사인 S 선생님은 어느덧 80대 중반을 넘어섰고 나도 80대 초반에 들어선 우리는 식성은 같은 편이다.
격동기를 살아온 동 세대의 역사관과 삶의 양식과 정서가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닮아있다.
그분은 의사로서 인품이나 직업에 대한 헌신은 남달라 누구에게나 존경의 대상임을 알 수가 있다. 바둑을 좋아하는 선생님은 애틀랜타의 프로급으로서 기왕의 영예를 획득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바둑에 문외한인 나는 바둑판의 그 심오한 묘수를 알 수가 없다.
가끔 “인간 삶이 바둑판만 못하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말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이해는 깊지 않아 음악을 좋아하는 나의 열정적인 내면의 세계는 더더구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현실의 중요성을 절대시하는 정신세계와 확고부동한 삶의 원칙에 충실한 신념을 지녔으나 자신의 이성을 신봉하는 편이다.
서로 정신과 내면의 균형을 이루는 선한 의지로 삶의 흠결을 내는 어리석음은 멀리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보수 성향의 세계관과 이념의 동질성은 뜻을 같이하고 있다.
크리스천의 가치관, 정체성은 객관적인 삶의 적용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항상 내면의 실체를 깊이 고찰하는 인문학도인 나와 상당 부분의 견해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서로 사유의 체계를 넓혀가고자 한다.
우리는 자주 전화로 소통하며 이따금 만나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환담하는 시간이 있다.
현재 시국관에서 생각을 같이하지만, 삶의 가치 추구와 취향은 서로가 다름을 인정한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의식이 경직되어 본질적인 것은 멀리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리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의 실체적인 삶의 상황이나 지향하는 정신세계는 판이하지만 말이다.
삶의 본질에 충실하기보다 비본질적인 것에 경도해 삶의 순수함을 잃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있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너그러움은 인간을 사랑하는(Humanism)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력을 존귀하게 여기며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마음을 말이다.
소중한 삶의 본질이 위태롭게 되는 내용의 고전적 소설 [천국의 열쇠] [성채]가 있다.
영국의 작가이며 의사인 “크노닌”은 불우한 어린 시절 탄광촌에서 성장했다.
자전적인 소설 [성채]는 탄광촌의 열악한 환경에서 환자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돌보는 휴머니스트 젊은 의사의 일대기이다.
고결한 영혼을 지닌 안드레아는 정직과 성실성으로 상류사회에 진출하는 성공을 이룬다.
그는 화려한 삶의 절정에서 세상의 유혹으로 영혼과 양심의 위기를 맞는다.
사랑하는 아내 크리스틴의 간곡한 충언에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명예와 아내까지 잃고 나락에 빠진다.
순수함 잃은 삶의 선택으로 법정에 서게 되면서 영혼과 심성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결말이다.
삶의 순수한 본질을 잃고 물질적인 채움에 전력을 다했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베푸는 삶의 교훈을 얻게 됨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