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사 엘리자벳 퀴블러-로스 박사의 책 <인생수업>에는 열여덟 살 아들을 둔 어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면 아들이 여자 친구에게서 받은 보기 싫은 티셔츠를 입은 모습에 화가 났다. 이웃들이 험담할까 두려워 매번 티셔츠부터 트집잡으며 아들을 꾸짖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퀴블러-로스 박사의 ‘죽음의 세미나’에 참석한 후 돌아 오며 스스로 물었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내 삶에 만족할까? 만일 아들이 내일 죽는다면 나는 어떻게 느낄까?” 그러자, 마음 속깊이 후회와 슬픔이 몰려왔다. “만일 아들이 죽는다면, 그 티셔츠를 그의 관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아들에게 의미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살아 있는 지금은 왜 그것을 존중해 주지 못할까?”
그녀는 집으로 돌아 가서 아들에게 그 티셔츠를 마음대로 입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아들은 그대로 사랑스러웠고, 그녀는 정말 행복해졌다.
이 실화는 행복과 스트레스가 외부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직면하는 스트레스나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짐이 될 수도 있고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종종 시련과 고통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상상처럼, 때로 고통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배움은 비극, 사망, 장애의 경험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우리의 시야를 바꾸고, 삶 전체를 변화시킨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헬렌 켈러 역시 비슷한 깨달음을 남겼다. “행복의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닫힌 문을 너무 오래 바라보느라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
성경은 말한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21) 모든 상황을 돌아보고 그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고 잡으라는 의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정반대로 행동한다. 나쁜 것에만 집착하며 스스로를 불행에 빠뜨리곤 한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후, 삶의 아름다움이 보였다는 환자처럼, 역경은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 젊은 시절 오랜 불치병으로 고통받았을 때 그것이 생애 최대의 재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고통이 나를 새로운 시야로 이끌었음을 깨달았다. 사방이 막혀서 어쩔 수 없이 ‘위’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보았고, 결국 그 오래고 고통스러웠던 시련에도 감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 인생의 새로운 길을 발견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질문 뒤의 질문>의 저자 잔 밀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삶은 생애가 당신에게 가져다 주는 것보다 당신이 생애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보다 당신이 일어나는 일을 보는 시야에 따라 결정된다.” 같은 역경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중국 고전 <역경(易經)>에서는 “발생한 사건은 중요하지 않고, 그 사건에 대한 반응이 모든 것”이라고 했다.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스트레스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다른 생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이 말을 조금 더 쉽고 구체적으로 “스트레스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좋은 것을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교육한다. 사람은 보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변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나쁜 생각은 자연히 사라지고, 위기는 기회로 바뀔 수 있다.
스트레스와 시련 앞에서 새로운 시각을 가져보자. 나쁜 일 속에서도 좋은 것을 찾아보자. 이러한 시야의 변화가 스트레스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갖는 것이다 (What you see is what you get)”는 말도 있지 않는가?
<박정환 보건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