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체험삼아 인내의 한계를 실험해 보기로 했다. 대담이 끝날 때까지 귀를 기울이기로 작정하고 대화의 귀결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그리웠다는 숨길 수 없었던 마음이 드러나 보인다. 측은지심으로 들어드릴 수 있는 행운을 만난 기분이다. 다행이었던 것은 대화에 끼어들 기회가 닿지 않아 덤벙대지 않았다는 소소한 안도감에 뿌듯한 여유를 얻게 되었다. 인내 한계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말이 분주한 사람으로 살아 가기에는 잘 갖춰진 표현력에 순발력이 발휘되지 못한터라 서두르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이나 느낌을 글로 표현 해왔었기에 말에는 항상 허술하고 어설프다. 글은 다듬고 다듬을 수 있는 여분의 넉넉함을 얻을 수 있음이지만 말로 전달하는 일에는 변함없이 노상 서툴다. 결론으로 얻은 것은 말을 설득력 있게 잘하는 사람들 축에 끼이지 못한 주제를 감사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지는 모임들에 참석하다 보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자신의 소신을 털어놓기에 여념이 없는 분들을 만나 몸 둘 바를 모를 경우들이 발생하곤 한다. 대화는 감정과 인지, 지성과 감성 사이를 넘나드는 일인데, 대중이 모인 곳이면 모임의 질서를 무시해가면서 까지 자신을 드러내야만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인물들이 심심찮게 눈에 띠인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르짖는다 해서 말하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화를 설득력 있게 잘하는 사람 대부분이 생각이 깊은 편이고 창의적인 분야가 넓게 조성되어 있다. 내가 지켜본 대화에 유능한 사람의 공통점은 대화 이전에 자신에게 질문하고 스스로 답해본 후에 말을 아끼며 자신을 성찰해왔다는 점이다. 자신과 진솔하게 대화를 나눈 사람이어야 타인과도 폭넓고 훈훈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대화는 들음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인정해 왔기에 무리들 가운데서도 말하는 편에 서기보다 듣는 편에 서기를 오래전부터 지켜온 터다.
이즈음의 세상은 화려하거나 번듯한 간판을 좋아하는 경향이 짙다. 화려한 백그라운드가 내용과 일치 하면 오죽 좋으리요 만 그렇지 못한데서 실망과 허무가 덧나게 된다. 어느 모임에서 였다. 어느 분이 자의적으로 뜬금 없이 ‘사랑’을 주제로 자기 생각을 열심히 피력했지만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허한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 그 주제는 설명이나 말로 표현되기 보다 느낌, 울림, 감각, 감정이 실린 난제가 섬세하게 숨겨져 있는 편이라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일 것이라는 생각에 머문다. 어쩌면 발언하신 분의 외로움을 쏟아낸 파장이 제대로 전이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까지. 세상은 갈수록 외향적인 간판을 좋아하는 흐름이 빚어낸 곁길처럼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실수가 빚어낸 대화의 결렬이 아닐까. 해서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사라지지 않고 있나 보다. 열변을 토하던 분의 표정이 일상 중에 문득문득 떠오른다. 인간세상 압축 판 같다는 생각과 함께. 설득력 있는 대화로 이끌어내기 위해 듣는 이들로 하여금 먼저 마음을 열도록 했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맴돌긴 하지만 어쩌면 일상에서 잘 훈련될 기회를 갖추지 못한 경청의 힘을 기르며 대화의 장으로 나설 수 있었으면 하는 대안도 떠오른다. 대화의 기본을 경험에서 얻어진 소재를 나누는 것 보다 미래 지향적인 대화 소재가 더 바람직할 수 있겠다는 추론까지 명제로 이끌어 내게 되었다.
살아가노라면 말을 청산유수로 잘하는 달변가도 만나고, 야무지지 못하고, 맛깔 나게 말을 잘 못하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들 중에는 실속 없이 말만 뻔질나게 잘하는 사람도 있고 두루두루 갖춘 사람인데 말까지 잘하는 사람도 있다. 한데 신기한 것은 달변가로 알려지신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누구보다 강단연설에 능하신 분인데 의외로 대화를 나누기에는 피곤이 몰려왔다. 상대를 의식하지 않으신 듯 자신 생각만 피력하시면서 대화를 나눌 기회는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짙었다. 대화는 테니스처럼 서로가 던진 공이 포물선을 만들며 정확하게 주고 받듯 상대의 말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서로가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이 최상의 대화 태도가 아닐까 싶은데, 어쩌면 대화 자체에도 서로가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데 대화가 잘 진행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그 보다 더 건실한 대화법으로 침묵까지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부럽다. 침묵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서로를 향한 신빙성이 두터운 친밀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각별하고 색다른 대화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관계에서 침묵은 서로 말없이도 이루어지는 대화일 수도 있겠지만 서로의 말을 존중하고 짧은 단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소통이 성립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일 게다. 대화는 들음에서부터 라는 말이 설 곳을 잃은 셈이 된다. 사회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질서나 행동 규율 등에 암묵적으로 부과되는 과정의 일부로 소통의 필수인 대화의 본질은 들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변함없는 불문율이다. 말하기 보다 먼저 들을 줄 아는 편만 한 세상이 도래하기를 소망을 얹어 기대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