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새로운 기반을 수립했고, 하와이에서 견고한 기반을 다진 20세기 초두의 미국은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이래, 여러 유럽 나라들은 중국으로부터 해군 기지와 조차지를 얻어냈고, 중국에 영향권을 수립했다. 유럽 나라들은 또한 인접 지역에서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투자하는 배타적인 권리는 물론, 독점적인 통상권까지 확보했다. 


아시아와의 초기의 외교관계에서, 미국정부는 모든 나라들이 동등한 통상 특권을 가질 것을 항상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 대외정책상의 이상주의는 극동에서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경쟁하려는 욕망과 갈등을 빚었다. 1899년 9월 국무장관 존 헤이는 관계강국들에게 각서를 보냈는데, 그 결과 중국에서의 모든 나라에 대한 "문호개방"의 원칙에-즉 유럽 강국들이 관장하는 지역들에서의 (동일한 관세, 입항세 및 철도 요금 등을 포함하는) 통상기회의 균등 원칙에-합의를 보았다. "문호개방"원칙은 이에 내포된 이상주의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식민지를 억지로 빼앗을 필요없이 식민지의 이점을 손에 넣기 위해 이용되는 교묘한 외교적 수단이 되었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중국인들은 외국인들을 습격했다. 그 해 6월 暴徒들은 북경을 점령하고 이곳의 외국공관들을 공격했다. 헤이 국무장관은 즉각, 미국은 중국의 영토권이나 행정권에 대한, 또는 "문호개방"정책에 대한 그 어떤 방해에도 반대한다고 유럽 강국들과 일본에 발표했다. 일단 폭동이 진압되자, 미국의 계획을 수행하고 엄청난 손해배상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데는 헤이의 수완이 절대로 필요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 영국과 독일은 다시 한번 문호개방 정책을 준수하고, 외세의 지배하에 있을 망정 중국의 독립보전을 존중할 것을 다짐했고, 다른 나라들도 이에 따랐다. 


1920년대까지 미국의 일본과의 관계는 중국과의 관계와 비슷한 패턴을 따랐다. 1907년 디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인 노무자들과의)경쟁에 대한 미국 노무자들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해 일본정부에 대해 노무자의 미국 이민을 임시로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이런일 말고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접어든 기간에 일본인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는 따뜻했고 평온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일본과의 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일전쟁(1904-1905)을 중재했던 때인데, 이때 그는 독일과 프랑스에 대해 러시아에 편들어 개입하여 일본에 적대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루스벨트는 이 전쟁의 강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