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을 만나고 떠나보내면서도 가을이 오면 늘 그랬듯이 가을 매마름을 절감하게 된다.푸르고 청청했던 잎들이 마지막 몸짓으로 황홀한 빛깔을 덧입으며 천지를 물들이고 낙엽되어 가랑잎으로 제몸을 누이는 스산한 가을 운치 때문만은 아닐것이라 여기지만 잡을 수 없는 세월이란 말이 가을이면 부쩍 선명해 진다.

잎들의 마지막 붉음의 절규를 즐기려는 행열은 가을이 물러날 때 까지 이어진다. 잎새들의 마지막 모습이 고운것만이 아닌 왠지 처절해 보이는 것도 가을이 주는 나이 때문일까. 이렇듯 낙엽을 떨구듯 삶의 부분을 잃어가는것이 나이들어 간다는것이란 생각이 밀려든다.

살아간다는 것이 매일매일의 흔적이면서 또한 소멸 돼가는 양면성을 품고있기에 시간시간을 그리고 하루들을 잃어가고 달력 한장씩을 잃어가며 계절을 한해를 잃어가고 있는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게 당연한 듯 받아들였던 일상들을 이 가을은 새로운 눈뜨임으로 나를 이끈다.

생명으로 잉태되어 모태를 떠나고 세상을 만나고 어머니의 품도 때가 되면 동생에게 내어주었어야 했고 세상 얼룩을 몰랐던 맑은 유년도 그리움으로 돌아서고 꿈많던 학창시절도 젊음이란 신기루에게 내어주었다. 서서히 세상을 알아가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안게되고 자녀들에게 열정을 쏟으며 인생을 달려왔다.

삶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고 산다는 것을 음미하게 되고 긴 노정 끄트머리에 당도한 이제사 잃어버린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워내며 최소한의 것 외엔 지니지 않는 가벼움으로 가랑잎처럼 가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을 바람에 실려 다녀야 한다는것이 가을이 주는 나이였다. 

어렸을 땐 얼른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들이 가진 능력과 앞서서 가고있는 발자국을 따라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때론 어른들만이 가진 자유의 높은 한계로 부러움을 불러들였던것 같다.

얼마 전 어르신이란 존칭을 받았던 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어른이란 단어가 불현듯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른으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무한대의 자유를 누리며 대접만 받는것이 아닌 어른다움을 지켜가야 한다는 무거움으로 다가와 가끔은 어른하기가 싫을때가 있기도 했었고 잠깐씩은 어른이란 짐을 놓아두고 아이로 살고 싶은적이 있었음도 감출 수 없다.

어른이란 더 많은 외로움을 견뎌야하고 허전함도 상처도 두엄처럼 썩힐 줄 알아야하는 것이 어른다움이며 어떤 동요나 떨림도 숨길 줄 아는 능숙한 삐에로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른이란 성장의 이룸이 아니라 진행형의 과정으로 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것인데 이 사실을 어른이나 어른이라 불러주는 젊은이들 까지도 잊고 있는 듯 하다.

쫓기기라도 하듯 한달음에 달려 온 시간들 속에 놓아버린 것들이며 놓쳐버린 것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허망함 앞에 새삼 많은것을 유실했다는 생각을 앞질러 아름다움으로 주위에 머물러있는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가을이 주는 나이였다.

많은 실책과 어수룩한 사람을 염려 해주는 따뜻한 이웃과 가족이 곁에 있음에 감사가 넘친다. 어차피 우리 인생도 나이테를 늘리기 위해 추운 계절을 지나야 하기에 가을이 지나가는것을  지켜보노라면 나이드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여유를 얻는다.

떠나는 가을은 세상을 관망하며 세상과 기쁨을 나누라는 나이의 이정표를 새롭게 건네준다. 어른다운 성숙한 자유와 비움의 미학과 화려한 단풍의 열정까지도 품을 수 있는 넉넉함으로 이끌어 내준다.

겨울이 기웃거리는 늦가을이 주는 나이는 삶의 향기를 남기며 떠나라 일깨워준다. 나이만 들어버린 어른이라 꾸짖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