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엘리트 학원
첫광고
경동나비

[전문가 에세이] 런치 투게더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3-11-02 11:51:30

전문가 에세이, 김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누가 스킨 케어

친정엄마는 깍쟁이 개성 출신이었다. 속이 노오란 좋은 배추를 만날 때마다 집에서 보쌈김치를 담갔는데 바깥 푸른 잎은 겉 보자기 만드는데 쓰고, 안에 들어간 하얀 속배추 위에는 갖은 고명을 올렸다. 잣, 대추, 깎은 밤, 낙지, 굴, 배…. 문제는 내용물 전체를 보자기로 싸는 과정인데 이게 생각보다 기술을 요하는 것이어서 허술하게 잘못 쌌다가는 김치보시기 안에서 보쌈이 헬렐레 풀어지기 일쑤. 행여 식당이나 남의 집에 갔다가 잘못 싼 보쌈김치를 만나면 깍쟁이 개성여인은 이렇게 비웃었다. “칠칠맞은 아낙네, 저고리 앞가슴 풀어진 꼴로 주물러놓고는 저런 걸 보쌈이라고…” 잘난 척, 개성 엄마의 보쌈은 어찌나 암팡지게 쌌는지 식탁 위에 올라온 매무새 단정한 보자기를 젓가락 끝으로 한 겹 한 겹 푸는 동안 입에 침이 고였다.

수십 년 전, 미국에 사는 자식들이 마켓에서 병 김치를 사다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엄마는 쯧쯧 혀를 차더니 손수 김치를 담가주겠다며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김포-나성 하늘 길은 하루가 꼬박 걸리던 시절. 인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국사람 끼리는 서로 짐을 전달해주기도 했고 지방에 사는 가족들은 손글씨 편지와 한국산 생필품들을 챙겨 인편에 부탁하는 일이 흔했다. 그러니 깍쟁이 개성 엄마가 자식들에게 직접 물건을 가져다줄 챈스를 놓칠 리가 없다. 

드디어 LA 공항 도착! 탑승자 명단이 터미널 게시판에 줄줄이 프린트로 올라오던 시절. 개성 여인 성명 아무개 확인! “걱정마라. 엄마가 짐 없이 가뿐히 갈게!” 말씀과는 달리, 마중 나간 나는 설마가 현실로 바뀌는 광경을 마주했다. 카트 하나가 굴러오기는 하는데 짐 뒤에 가린 사람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경사로를 지나 드디어 나타난 조그만 체구의 아시안 할머니. 카트 위에는 어마어마하게 실린 짐 보따리와 더불어 누군가 부탁한 오베이션 기타 케이스, 그리고 개성에서 피난길에도 목숨 걸고 들고 나왔다는 개다리소반 하나. 상다리가 개다리 모양이라 하여 이름 붙은 개다리소반은 조선시대 명장이 손수 깎아 새긴 꽃모양이 수놓인 아름다운 작품으로 상판은 동그란 모양이다. 내가 미국으로 오기 전, 그 상 위에서 보쌈김치 해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넌 시집은 안가냐?’ 엄마의 잔소리도 듣던 상.

상은 그렇게 둥그런 모양이 좋다. 네모 테이블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만 둥그런 상에 모인 가족, 친구들의 자리처럼 훈훈하고 이해받는 세팅은 또 없으리라. 트렁크에 들어가지도 않는 괴상한 사이즈의 소반을 기어이 들고 오신 개성 엄마의 극성 덕분에 그때 아직 싱글이었던 나는 그 상 위에서 많은 따스한 자리 경험을 이어갔다. 미국 클래스메이트들이 놀러오면 소파 대신 리빙룸 바닥에 소반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쥐나는 다리를 두드려가며 수다를 떨었다. 

둥그런 테이블 위의 대화는 공격적이지 않고 서로 소속된 느낌을 준다. 자유롭게 생각을 펼쳐도 받아들여진다. 내 주장이 아니고 사회심리학자들의 리서치 결과가 그것을 증명한다. 내 상담실에는 둥그런 테이블을 놓았다. 내담자가 더 쉽게 마음 빗장을 풀게 하려는 배려이다. 우리 집에서도 라운드 테이블을 사용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 개성 엄마는 세상에 없다. 그러나 살아계실 때 같이 라운드 테이블에 앉아 “네 남편한테 잘 해라. 공부만 하지 말고!” 하시던 잔소리를 그리움으로 떠올린다. 세상이 찬바람으로 느껴질 때 친지들과 라운드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런치를 나누는 일보다 더 좋은 행복은 없다. 거기에 잘 익은 보쌈김치 한포기까지 얹으면 금상첨화이고.     

<김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시] 애틀랜타 코페 영웅들
[내 마음의 시] 애틀랜타 코페 영웅들

권  요  한(애틀란타 문학회 회장) 올해 의욕있게 출범한떠오르는 도시 애틀랜타 코리안 페스티발재단 이민 보따리 메고태평양 건너온 용기있는청년들이 의기투합 뭉쳤다 5개월 준비끝 슈

[애틀랜타 칼럼] 목자들의 성탄 준비

이용희 목사 목자라는 말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양치는 목동들” 하면 평안한 안식과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의

[벌레박사 칼럼] 엄청 큰 주머니 쥐(possum)가 나타났어요

벌레박사 썬박 날씨가 추워지면서 주변에 가끔씩 보이는 동물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파섬이라고 불리는 큰 주머니 쥐 종류의 동물이다. 파섬은 일반적으로 덩치도 크고, 공격적인 성향이

[법률칼럼] 추방재판후 입국

케빈 김 법무사   미국 이민법 INA §212(a)(6)(B)에 따르면, 추방재판 출두 통보서를 받은 외국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이민법정에 출두하지 않고 출국했을 경우, 해당 외

[행복한 아침] 송구영신 길목에서

김정자(시인·수필가)          송구영신 길목이다. 한 해를 바르게 살아왔는지 가슴에 손을 대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답변이나 해명을 제시해야 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어디에도

[만파식적] 아베 아키에
[만파식적] 아베 아키에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의 접촉점을 찾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당선인과 만나 그가 일본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오늘과 내일] 스트레스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

정신과의사 엘리자벳 퀴블러-로스 박사의 책 <인생수업>에는 열여덟 살 아들을 둔 어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면 아들이 여자 친구에게서 받은 보

[뉴스칼럼] 연말의 숙제, 선물 샤핑

연중 최대 샤핑시즌이다. 온라인 샤핑이 대세라고는 해도 이것저것 살피고 만져보고 비교해보며 샤핑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은 실물 샤핑 센터. 샤핑몰 주차장마다 밀려드는 차들

[뉴스칼럼] 계엄… 알고리즘과 닭 싸움

유튜브가 영 재미없다는 사람이 있다. 유튜브를 켜면 농기구만 뜬다고 한다. 그는 농사와 정원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유튜브에서 농기구를 검색하곤 했다. 영특한 유 선생이 이걸

탄핵 정국 속 전세계가 주목한 ‘K-민주주의’
탄핵 정국 속 전세계가 주목한 ‘K-민주주의’

대한민국은 비서방 국가로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함께 이룬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 한국전쟁, 독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좀처럼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