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송구영신 길목이다. 한 해를 바르게 살아왔는지 가슴에 손을 대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답변이나 해명을 제시해야 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세상이라는
아우성이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일상이 경쟁이요 도태되지 않으며 살아내야 하는 세상이라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지만 주변에 쉽사리 외로움을 내보일 수 없음은 도심 한가운데서 귀양 살이 유배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어찌 할 바를 모를 때 찾을 수 있는 장소나 사람이 쉽지 않다. 말 없이 그저 나 답게 있어도 용납되는 장소가 있다면 삶의 곤고를 위안 받을 수 있을 터인데 아예 그런 곳이 없어서 인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송구영신 풍경은 영하 추위 아침이었는데 오후가 되면 동화 같은 햇살이 찾아오듯 의외로 뜻 밖의 다사로움을 만나기도 하고, 생각 하지도 않았던 얽힘 들이 산만하게 일상을 몰고 가기도 한다. 묻어 두고 싶은데 정립해야 할 일이라며 마구 마음을 꼬집어대는 일도 있지만 송구영신을 정갈한 마무리로 끝맺음 하고싶은 바램 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한 해를 정돈하는 송구영신 길목에서 마음을 서걱거리게 하는 것은 관계였다. 스쳐간 관계들을 살펴보면 관계를 찢는 자가 있고, 꿰매는 자가 있고, 잠잠한 자가 있는가 하면, 싸움질을 도모하는 자들이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것도 상처가 아물고 난 후 에야 낌새를 간파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 했다. 관계의 벽에 부딪혔을 때도 쌓인 갈등을 상대가 의식해 주길 바램 했던 기대에 맞물려 나 역시 완벽하거나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접어버린 일도 부지기수다. 관계 선택 또한 독자적 선택이 아니었 듯 상대 마음 기울기도 일방적 선택이라서 전전긍긍 나를 갉아먹듯 소모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나서서 완전하게 덜어줄 짐도 아니요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이라서 그냥 찌꺼기가 남겨진 그대로 받아 들이기로 했다. 최선을 다했다는 안도감이 한 몫을 해주고 있기에 저들을 위해 기도하며 소망해온 평온한 삶을 살아 내라는 결론을 얻었다. 대상이 누구든 그동안 누적된 기억들과 응원의 마음들을 간직하며 평화롭게 살아내고 싶다. 더는 뒤엉키는 일이 없기를 바램 하면서 그냥 받아 들이기로 마음을 정한다. 이미 관계의 굳은 살이 박힌 노년이기에.
관계는 나와 상대가 존재하기에, 내가 포함되면서 생긴 일들임을 자인 하고는 있지만 그 얽힘으로 나 역시 편치 않은 마음이라서 송구영신 길목에서 모두 내려 놓으려 한다. 사람 탓만 해대며 살기엔 시간이 아깝고, 억울해 하며 기억줄을 뒤집기엔 저장하고 인출 해야 하는 수용기능이 낙후된 지라 서로의 기억 둘레와 끝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알맞은 사랑 위주로 사람 사이 질서를 기조로 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주변의 평안과 행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은 대체적으로 쉽사리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차라리 사리에 밝아서 이익 추구를 꾀하며 주변 평안에는 염두에 두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에고이즘이 세상을 살아내는데 편리할 수도 있을 터이요 부딪힐 일도 없을 것이다. 들어 주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미련 반 푼이 반열에 자신도 모르게 올라있는 일도 없을 터이요, 사람 사이에 암벽이 쳐지고 왕따로 몰리는 일도 없을 터이다. 사람으로부터 얻은 아픔을 지우는 지우개는 존재하지 않기에 극복하는 길 뿐이다. 무거운 생각을 밀어내며 영혼의 내실을 온유로 경작해 간다면 갈수록 풍성해지고 윤택해 지리라 믿음 하게 된다. 갑진 년 한 해를 갈무리로 간수 해야 하는 송구영신 길목이라서 간곡해지는 기도가 묵묵히 쌓여간다.
문제는 초점 발견이다. 파생된 문제점을 외부로부터 찾아내기에 급급했지만, 자신 내부로 시선을 돌리며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데 집중 했어야 했던 것을. 끊임없이 자책하는 자아에게 '너나 잘하세요' 라는 정답을 발견했다. 세상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굳이 지각하려고 하지 않으며, 능력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 곁으로 집중되는 무심한 흐름은 여전하다. 야망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려는 부류의 인생들이 그 덩치를 키워가고 있음도 안타깝다. 시대상이 그럴수록 가늠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남은 날들의 무게를 은퇴가 아닌 서서히 물러남으로 또 다른 여정을 모색해보는 방향 전환으로 한숨을 돌리기로 했다. 바라보아야 할 목표가 향방 없이 흘러가는데도 참된 이치와 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시대 풍조가 만연하고 있지만, 무겁게 둘린 구름도 시간이 지나면 무심히 걷히고 맑은 하늘을 드러내듯 송구영신 길목에 서면 언제나 이듯 새해에 해야 할 일들이 선명해 진다.
송구영신 절기 앞에 설 때마다 노구를 찾아 드는 소망이 있다. ‘사람 마음이 우주와 만날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공간이 마련된다면, 피조물끼리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이을 수 있는 터널 같은 마음이 갖추어진다면, 우주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는 평화의 통로를 만들 수 있을 터인데’.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인데 작은 소망은 사그라질 줄 모른다. 세밑마다 그래왔듯 돌아보면 반성과 아쉬움, 후회로 가득하지만 “더는 애태우지 말자” 기지개를 켜면서 쾌청한 겨울 하늘처럼 눈부신 마음을 심어 가자고 다짐해본다. 새롭듯 가다듬은 경각심으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로 맞아들일 새해맞이를 위해 몸과 마음의 매무새를 고쳐 다듬으려 한다. 평화롭게 열리는 새해이기를 기원 드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