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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의 시선] 우아한 ‘싸움닭’ 다이앤 파인스타인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3-10-04 11:46:13

정숙희의 시선, LA미주본사 논설실장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

1978년 11월27일, 샌프란시스코의 조지 모스콘 시장과 하비 밀크 시의원이 동료였던 댄 화이트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전직 시의원 댄 화이트는 시의회의 진보 노선에 반대하며 사임했다가 다시 복귀하려던 중이었는데, 밀크와 모스콘 시장이 이를 막으려는 조짐을 보이자 앙심을 품고 두 사람을 저격한 것이다. 

그날 아침 시청에서 첫 번째 총성을 듣고 가장 먼저 사무실에서 뛰쳐나온 사람이 다이앤 파인스타인 시의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화이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고, 바로 직후 또 한방의 총성이 울렸다. 밀크의 방으로 달려간 그녀는 바닥에 엎어진 그를 발견했고, 맥박을 짚다가 손가락이 총알이 관통한 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그가 숨졌음을 확인했다고 2018년 암살 30주년 인터뷰에서 술회한 바 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여성 시의장이던 파인스타인은 몇 시간 후 시청 발코니에서 기자회견을 소집했고 이 충격적인 소식을 차분하고 침착하게 전했다. 또한 혼란에 빠진 샌프란시스코 시청을 재빨리 수습했고, 충격과 비통에 잠긴 시민들이 질서와 안정을 찾도록 기민하게 대응했다. 훗날 미국 연방 상원의 최장수 여성의원이자 최고령 상원의원으로 역사에 기록된 선구적 정치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파인스타인은 막 공직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날 아침 암살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몇시간 전, 그녀는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정계를 떠날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시장 직에 두 번 도전했으나 잇달아 고배를 마신 좌절, 그리고 6개월 전 남편 버트람 파인스타인이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픔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비극적 사건이 그녀를 시장 자리에 앉혔고, 이후 두 번의 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하면서 1988년까지 10년 동안 이 도시 최초의 여성 시장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이다.   

“모스콘과 밀크의 암살사건이 나를 시장으로 만들었고, 나의 정치인생을 형성했다”고 공언할 만큼 그날의 사건은 그녀의 정치인생의 낙인이고 지표이며 화두가 되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만진 총기의 파괴력을 실감한 그는 평생 총기규제에 앞장섰고, 1994년 반자동소총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키기도 했다.   

시장에서 물러난 파인스타인은 1990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가 피트 윌슨에게 패했다. 하지만 2년 후 앨런 크랜스턴 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이 은퇴한 자리에 출마해 가주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이후 6년 임기의 상원 직에 5번 재선되어 31년간 봉직했다. 그는 상원 사법위원회와 정보위원회의 첫 여성 의장을 지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상원 소위원회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최초의 여성으로서 주와 연방 정가에서 유리천장을 깬 기록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진보적인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중도파였던 파인스타인은 자신의 정치적 득실을 떠나 대의를 위해서는 서슴없이 타협하는 실용적 입장을 취했다. 직설적이고 강인하며 집요한 투사인 그를 반대파들은 ‘싸움닭’이라고 불렀지만 동료들은 “성실하고 고결했으며 우아했다”고 회상한다.

지난 달 28일 파인스타인은 몸이 좋지 않아 오전의 사법위원회 미팅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찰스 슈머 원내대표에게 중요한 표결이 있으면 참석하겠다고 말해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한 표가 필요한 표결이 열렸다. 임박한 연방정부 셧다운을 막기 위한 투표였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 파인스타인이 보좌관의 부축을 받아 상원 회의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서기 앞에서 오른 손을 들어 “예”(Aye)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투표였다. 지난 30여년간 던진 9,500여 캐스트의 대장정이 거기서 끝났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오랜 친구이자 은퇴 하원의원인 제인 하만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고, 딸 캐더린이 오자 곧바로 잠자리에 든 후 이튿날 새벽 2시께 숨을 거뒀다. 향년 90세. 그의 건강이 악화된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타계 소식은 갑작스러웠다.

수년전부터 인지력 퇴화를 보여온 고인은 치매에 걸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올해 3월 대상포진으로 입원한 후에는 합병증으로 뇌염에 얼굴 한쪽에 마비가 오면서 눈에 띄게 건강상태가 악화됐다. 몇 달 동안 상원 회의와 표결에 출석하지 못한 것은 물론, 연방의회의 최고령 현역으로 ‘고령 정치인 논란’의 중심에서 사임 압력에 시달려온 그는 사임 대신 ‘복무 중 사망’(died in office)을 택했다. 

뼈만 남은 앙상한 체구로 휠체어에 앉아 얼굴이 다 허물어진 사진들을 보면서 솔직히 왜 저 지경에 이르기까지 자리를 지키려할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평생 쌓아온 날선 정치인의 이미지와 업적을 자신이 모두 흐리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하지만 그가 떠난 자리를 보면서 ‘공직자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 정치인 파인스타인은 그 자신만의 방법으로 캘리포니아 주민과 미국민을 위해 끝까지 봉사하고 떠났다. 수많은 도전에 맞서며 여성들의 롤 모델이었던 한 선구자의 정치인생에 경의를 표한다. 

고인의 시신이 워싱턴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동향이며 후배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원이 마지막으로 동행했다. 오늘(4일)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하루 시민들의 조문을 받고 5일 장례가 치러진다. 

<정숙희  LA미주본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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